이번엔 탑골공원에 와 보았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목적지로 삼은 것은 아니었고
동대문에서 명동까지 산책하듯 걸어서 외출을 하다
이곳을 지나면서 들어가보게 되었습니다.
탑골공원 하면 역사적 의미보다도 그냥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
소일하는 분위기가 떠오르기 십상입니다.
그런 생각을 조금 깨뜨려보고 싶어 탑골공원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남문이자 정문에 해당하는 삼일문을 찍으려 했는데
이미 선객들이 와 있었습니다.
무슨 국가안보법 철폐를 외치고 있는데
이석기 사진이 있는걸 보니 뭐....
옆에서 구경하던 한 할아버지의 외침이 떠오르네요
"꺼져, 이 새X!!"
탑골공원 안내도 입니다.
작은 공원으로 생각했으나
생각외로 볼 것이 많아 보였습니다.
삼일문으로 들어섰을 때 보이는
탑골공원의 전체적인 풍경
역시나 알고있던 이미지대로 많은 어르신들이 쉬고 계시네요.
3.1운동 기념탑
기미독립선언서의 내용을 확대해서 세겨넣은 곳입니다.
가운데 독립선언서의 원본을
오른 쪽에는 한글로 해석된 글을
왼 쪽에는 영문으로 번역된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기념탑 옆에 위치한 멋진 나무.
약 200년 가까운 나이를 자랑하는군요.
이 나무도 뭔가 벼락이 내리치듯
나무 줄기가 휙휙 꺽인것이 무척 멋있습니다.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호는 의암(義菴), 동학·천주교 지도자, 교육가 , 독립운동가
1861년 4월 8일 충북 청주 출생, 본관은 밀양, 초명은 응구(應九), 부친은 두흥(斗興), 모친은 최씨(崔氏)
1882년 동학(東學)에 입도
1883년 동학의 제2세 교조 해월 최시형의 수제자로 수도에 전념
1894년 동학군의 통령으로 경기충청지역 동학군을 이끌고 전봉준과 함세한 뒤 공주 이엔에서 관군 격파, 우금치전투에서 현대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개입으로 혁명이 좌절되자 함경도·평안도로 은신
1897년 최시형으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아 동학의 제3세 교조가 됨
1901년 일본으로 망명, 이듬해 이상헌이라는 이름으로 오세창, 권동진, 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
1902년 일시 귀국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이광수 등 청년 64명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유학시킴
1904년 동학 교인들로 하여금 진보회(進步會)를 조직케 하고 갑진(甲辰)개화운동 지도
1905년 12월 1일을 기해 교단의 명칭을 천도교(天道敎)로 바꿈
1906년 1월 귀국. 천도교중앙총부 설립, 일간지 만세보 창간. 이용구 등 친일 교인 60여명을 출교(黜敎)시킴
1910년 보성전문학교 인수. 이후 전국적으로 30여개의 학교를 인수·운영하거나 지원
1912년 우이동에 봉황각을 짓고 483명의 중견교역자를 양성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독립선언을 주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름
1920년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1922년 5월 19일 상춘원에서 옥고 후유증으로 순국
1965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주변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싶었더니
학교에서 현장학습을 나온 모양입니다.
대원각사비
지정번호 : 보물 제3호 / 시대 : 1471년(성종 2)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가 38-3번지
대원각사비는 1471년(성종 2)에 세조(世祖)가 원각사를 창건한 경위를 적어 세운 비석이다. 불심이 돈독했던 세조는 양주 회암사에서 분신(分身)한 사리를 보고 감동하여 1465년(세조 11) 흥복사(興福寺) 터에다 원각사를 지었다. 이어 1467년(세조 13)에 13층 석탑이 완성되자 연등회를 열고 낙성식을 거행하였으며 그 전후사정을 적은 비석을 조성하게 하였다.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을 만들고 그 등 위에 연잎을 새겨 비석 몸돌을 세울 자리를 만들었다. 몸돌은 머릿돌인 이수(螭首)와 한 돌로 만들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494cm이며 거북은 화강암으로, 몸돌과 머릿돌은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당대 문장과 글씨로 이름난 사람들이 비문을 맡았다. 김수온(金守溫)이 앞면의 글을 짓고, 성임(成任)이 그 글을 썼으며, 서거정(徐居正)이 뒷면의 글을 짓고, 정난종(鄭蘭宗)이 그 글을 썼다. 연산군 대 궁궐에 인접한 민가를 철거하면서 원각사는 빈 절이 되었다. 근대에 들어 공원으로 변모한 이곳에는 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이 비석만 남아 원각사의 옛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발굴출토 우물
2001년 탑골공원 재정비(성역화) 사업으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시행한 시굴조사 때 발견된 우물 가운데 하나이다. 우물은 원통형으로 직경 1.3m이며 잔존 깊이는 5.2m에 달한다.
내부는 회색을 띤 직사각형 벽돌을 사용하여 면을 고르게 축조하였다. 발견 당시 우물 내부는 바닥까지 모래와 마사토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일시에 폐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에서 일본 동전과 상평통보, 일본산 맥주병 등이 발견되고, 벽돌이란 사용재료, 그리고 축조방법을 미뤄 조선말기(대한제국기)에 조성한 뒤 일제강점기까지 사용된 우몰로 판단된다. 시굴조사 전에는 우물 상부에 보호용으로 추측되는 장대석으로 사각형 틀을 짜서 올려뒀었는데 수리하면서 지금 모습처럼 만들었다. 서울 4대문 안에서 민강용 우물이 발견된 사례가 드문 사정에 비출 때 이 우물은 조선후기 한양의 생활사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탑골공원 팔각정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3호 / 시대 : 1902년(광무 6)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가 38-1번지 탑골공원
팔각정은 1902년(광무 6)에 탑골공원 안에 지은 팔각형 정자다. 이곡승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이다. 팔각정은 장대석 기단 위에 둥근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 부분은 물익공을 짠 후 기와지붕을 덮었다. 전통과 근대의 건축 기술을 두로 사용했던 건축가 심의석(沈宜碩 1854~1924)이 주도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탑골공원은 서울에 만들어진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이 공원이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 이견이 있으나, 1890년대로 알려져 있다. 이 공원은 고종 대 총세무사로 활약한 브라운(John Mcleavy Brown, 栢卓安)이 건의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탑동공원, 파고다공원 등으로 불리다가 1991년부터 공식적으로 탑골공원이 되었다.
원각사지 십층석탑
지정번호 : 국보 제2호 / 시대 : 1467년(세조 13)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가 38-2번지
이 탑은 세조(世祖)가 세운 원각사(圓覺寺) 터에 남아 있는 높이 12m의 십층 석탑이다. 원각사는 1465년(세조 11)에 조계종의 본산이었던 흥복사(興福寺) 터를 확장하여 세운 사찰인데, 이 탑은 2년 뒤인 1467년(세조 13)에 완성했다. 세조는 사리분신(舍利分身)하는 경이로운 일을 겪은 뒤 원각사를 짓기로 결정하였는데, 공사 도중에도 사리분신하고 서기가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지금 견해로는 십층 석탑이지만 사료에는 13층의 탑(窣覩婆솔도파)을 세원 분신사리와 새로 번역한 '원각경(圓覺經)'을 모셔 두었다고 한다. 亞자 모양의 기단은 세 겹인데, 아래에는 용과 연꽃 무늬를 새겼고, 중간에는 삼장법사(三藏法師)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일행이 인도에서 불법(佛法)을 구해 오는 과정을 그려 새겼다. 위에는 부처님의 전생 설화와 일생을 조각하였다. 법회 장면을 새긴 탑의 몸체에는 현판, 용을 휘감은 기둥, 목조구조, 지붕을 두었는데, 마치 하나의 건물 같다. 탑을 마든 재료는 흔치 않은 대리석이며, 독특한 형태와 조각 솜씨는 조선시대 석탑의 백미로 꼽힌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에 제작한 경천사 십층석탑(국보 제86호)과 여러 면에서 매우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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