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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자살한 과학자들 2 - 소다 제조법의 발명자 르블랑

by 소행성3B17 2016.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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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살한 과학자들


  어떤 이유에서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인류 역사의 여러 방면에서 잘  알려진 인물들 중에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생을 마감  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비운의 화가  고흐, 세기적 문호 헤밍웨이 (여기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등 문화, 예술 방면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던 이들도 있고,  히틀러와 같은 실패한 정치가도 있고 그밖에도 많은 경우들이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사에 있어서도 자살한 사람들의 경우가 결코  적지 않다. 그 원인이야 연구상의 좌절이나 위기  등 자신의 일과 관련된 것 이었든, 아니면 가정사나 다른 개인적  문제였든간에 일일이 파악  하기도 쉽지 않겠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중요한  인물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과학기술자들의 자살에 관하여 심층적으로 분석, 연구된 바가 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들  몇몇의 경우를 살펴 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듯 하다. 




소다 제조법의 발명자 르블랑 




  화학식 NaHCO3,  명칭은 탄산수소나트륨,  산성탄산나트륨, 중탄산나트륨 등 여러 가지로 불리는 화학물질이  하나 있다. 간단히 "소다"라고 말하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화학공업이 근대화되고, 급속히 발전된 오늘날에는 그다지 특별히 중요한 물질이 아닐 수도 있겠 으나, 역사적으로 소다는 근대 산업사회에는 무척 중요한  물질의 하나였다. 황산과 아울러 소다의 대량 제조가 중화학공업의 시초이기도 했다고 볼 수 있다. 


  산업혁명기의 영국에서는 급속히 발전한 방적, 직물공업에 따라서 많은 양의 직물들이 생산되었는데, 이것을 완제품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깨끗이 씻기 위한 비누 역시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비누의 원료가 되는 소다를 당시에는 나무를 태운 재로부터 얻었는데, 갑자기  폭증한 소다의 수요를 감당하 기 위해서 엄청난 양의 나무를 필요로 하였으므로, 유럽의 각 지역에서는 산림이 황폐화될 지경이었 다. 따라서, 나무를 태우지 않고 소다를 대량으로 제조하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해초를 태운  재를 소다의 원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스페인으로부터 수입해서  비누를 만드는 데에  써 왔으나, 18세기 초 프랑스와 스페인의 전쟁이후  수입이 막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1775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는 소다의 대량  제조법의 발명에 2400프랑의  상금을 걸고서 널리 모집하게 되었다.  마라르베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소금과 황산으로부터 소다를 만드는  방법을 고안하여 상금을  타기도 하고, 실제 소다의 제조에 그 방법이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그 과정에 서 철이나  납, 식초와 석탄 등이 필요하였으므로 그다지 값싼 방법은 아니었다. 


  그 후, 프랑스의 귀족 오를레앙 공의 전속 의사로 일하던  르블랑 (Nicolas Leblanc; 1742-1806)은 한때 화학을 공부했던 사람으로서, 소다의 제조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보다 싼 가격으로 소다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던 그는, 소금과 황산으로 황산소다를 만든 후, 숯과  석회석을 섞어서 노 속에서 구워서 소다를 추출해내는  방법을 발명하였고, 이른바 "르블랑식 소다 제조법"으로 불린 이  방법은 과학아카데미에도 당선되었다. 1790년, 조수와 함께 대량 생산법을 개선한 그는 본격적으로 소다의 생산을 시작할 계획을 세우고,  이듬해인 1791년 오를레앙의  자금을 바탕으로 하여 소다 공장 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의 소용돌이가 점점 거세어져서, 쟈코뱅 산악파가 득세한  이후에는 국왕 루이 16세를 비롯한 많은 왕족, 귀족들이 사형에 처해졌고, 드디어  르블랑의 후원자 였던 오를레앙 마저 1793년 11월 재판에 회부되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과정에서 오를레앙 의 전재산은 혁명정부에 의해 몰수되었으며, 르블랑의 공장 역시 그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공장에서 쫓겨 났으며, 르블랑식 소다  제조법의 비밀은 그에게 아무런 보상도 없이 일반에 공개 되고 말았다. 혁명의 소용돌이가 조금 잠잠해지게 된 후, 프랑스 정부는 산업에 꼭  필요한 소다의 제조를 촉진하기 위하여 그의 공장을 돌려 주었으나, 이미 7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르블랑은 공장 재건을 위하여 자금을 모으고 설비를 갖추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아내마저 병석에 눕게 되었다. 아내와 함께 극빈자 구호소에 들어 간 그는 절망 속에서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 1806년 권총으로 자살을함으로써 한많은 일생을 마감하였다.  르블랑은 소다 공장을 세우기 직전인 1790년 3월, 자신의 불길한  운명을 예견한 듯 소다 제조법이 담긴 가방을 한 변호사에게 맡겼는데, 보관기간이 "50년"이라고 말해서 변호사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로부터 66년이 지난 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는 그 가방을 발견하였고, 그 안의 서류에는 르블랑식 소다 제조법 과 함께 그가 최초로 그것을 발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자손을 위하여 발명의 권리를 남기려 한 그는, 자신이 예감한 대로 프랑스 대혁명의 와중에서 비극 적인 삶을 마쳤다. 한편, 불행한  발명가 르블랑이 발명한 소다 제조법은 그 후 아일랜드 출신의 머스프래트(1793-1886)에 의해 영국에서 크게 빛을 보게 되었는데, 그는 리버푸울을 비롯한 영국의 여러 지역에 르블랑식 소다 공장을  세우고 엄청난 양의 소다를  생산해내었다. 머스프래트에 의해 대성공을  거둔 영국의 소다  제조업은 중화학공업 발전의 시초가 되었고, 르블랑의 소다 제조법은  19 세기 후반 솔베이법이라는 새로운 소다 제법이 나오기 전까지  널리 이용되었다. 소다 제조법의 경우 도 "애써서 발명한 사람 따로, 돈 번 사람 따로"인 경우의 한 예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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