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0월 26일은 대한민국 역사에 있어서 의미가 깊은 날입니다.
1909년에는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있던 날이고
1979년에는 독재자 박정희가 심복 중 하나였던 김재규의 손에 의해 죽은 날입니다.
조선을 집어삼킨 일제의 총리와 독재가가 죽은 날이기에
인터넷 상에서는 기뻐하고 기념해야 하는 날이라며 탕탕절, 혹은 더블 탕탕절로 불리곤 합니다.
그래서 저도 드립용 유머짤이나 하나 만들어볼까 해서 외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반인반신이 생전에 즐겨먹었다는 하동관 곰탕도 먹으러 갔다왔고
(맑은 국물의 깔끔하고 맛있는 곰탕이어서 원래부터 유명한 곳이지만 비쌉니다. 많이 비쌉니다.
제일 싼게 12,000원.... 으어... 사진의 저게 15,000원짜리 특.... 으어어어어.....)
명동에 온 김에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한국인에게 언제나 회자되는 매국노 이완용이 이재명 의사에게
깔빵을 맞은 성소, 명동 성당도 오랜만에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오늘과 박정희, 이토히로부미의 생일을 조합해서 로또도 한 장 구입했습니다.
그렇게 순조롭게 드립거리를 만들고 있을 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오늘이 안중근 의사의 의거 날인데 기념관이라도 가볼까?'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위치는 남산도서관 옆, 도보로 약 35분 거리.
바로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아차... 오르막 길이다... 걸어간게 후회가 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다행히 남산 케이블카를 타는 곳부터 완만한 경사라 거의 평지나 다름없어서 편해졌습니다.
무사히 기념관에 도착했습니다.
초행길이라 중간중간 검색을 하면서 오느라 약 4~50분 정도 걸린것 같았습니다.
기념관 터에 들어서면 안중근 의사께서 맞아 주십니다.
처음에는 이 건물이 기념관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요.
이 곳도 뭐하는덴가 싶어 나중에 들어가 볼까 생각했는데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 나온 시간이 오후 5시가 다 된터라 너무 늦어서 포기 했습니다.
기념관 터 곳곳에는 안중근 의사의 필체를 새긴 바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 하나 둘러본 후 기념관으로 향했습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전경.
입구는 오른쪽으로 돌아 내려갑니다.
지금 보이는 1층부분이 사실상 2층 위치이더군요.
기념관으로 향하고 있는 어르신들의 무리. 안중근 의사 의거 107주년을 맞이해 찾아 오신듯 합니다.
저는 기념관 터를 둘러보느라 조금 나중에 들어갔는데, 나중에 기념관 안에서 이 어르신들 사이에 꼽사리 껴서 같이 강의를 들었습니다.ㅎㅎ 특히나 한 두분은 기념관 직원을 지식으로 뚜카 패면서 당황 시킬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가지신 분들이었습니다.
요렇게 오른 쪽으로 돌아 밑으로 내려가면 기념관 입, 출구가 나옵니다.
건축상도 받은 모양이군요.
기념관 입구로 내려가는 길 오른 편에는 안중근 의사의 필체가 새겨진 대리석 벽들이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안중은 의사께서는 낙관대신 손도장을 많이 찍으신 듯 합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안중근 의사께서 앉아계시는 동상이 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이 동상은 안중근 의사께서 사형을 당하시기 직전에 찍은 사진의 모습을 본 따 만들었다고 합니다.
다만 사진에는 수갑을 차고 계신데 동상에는 수갑을 없앴다고 합니다.
[기념관 내 전경]
[사형을 받으시기 직전의 모습]
기념관 내에 더욱 많은 사료와 볼거리가 많았지만
어르신들의 무리를 따라 다니며 강의 듣기에 바빠서 사진을 많이 남기지 못했습니다.
사실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는 직접 방문해 보시는게 나을 것 같아
박물관 관련 포스트 같은 경우에는 전경과 소개만을 주로 하고 안의 내용물은 많이 올리지 않고 있습니다.
각설하고 이렇게 드립거리나 만들러 밖으러 나왔다가
독립을 위해 싸워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경건한 마음으로 하루를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대한국인 안중군 의사
한국 독립운동의 영원한 상징 안중근은 처음에는 계몽운동을 펼치다가 1907년 국외로 망명하고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09년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 평화의 파과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면서 민족과 인류의 구원 앞에 자신을 산화시켜 간 의사이다.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중근은 문명개화론자인 아버지 안태훈의 영향 아래 어린 시절을 황해도 신천의 청계동 산골 마을에서 학문을 수학하고 무술 연마에 힘을 기울이며 성장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에는 동학군의 공격으로부터 청계동을 지키는데 선봉으로 활약했으며, 1897년 프랑스인 빌렘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천주고에 입문하였다. 전도활동을 벌이던 무렵 그는 한국인의 지식 계발을 휘해 '대학' 설립을 계획하기도 했다.
러일전쟁이 끝날 무렵 안중근은 아버지 안태훈과 상의하여, 중국 산둥이나 상하이로 가족을 옮겨놓고 항일투쟁을 전개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국내에서 계몽운동을 펼치기로 계획을 바꿨다. 1906년 봄, 전남포에서 삼흥확교와 돈의학교를 통해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 군대해산 등으로 나라가 위기를 맞자 국외 망명을 단행하였다.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로 망명한 그는 각 마을을 돌며 의병 모집을 위해 힘을 쏟아 의병부대를 창설하였다. 그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하여 여러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의병 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1909년 초 단지동맹을 맺고 의병 재기의 의지를 다져 나갔다.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찾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1909년 10월 26일, 의거를 결행하니 안중근의사의 하얼빈 의거가 그것이다. 안중근의 의거는 이토 히로부미와의 개인적 원한이 아니라 한국 도립, 동양 평화를 위해 거행한 의거였다. 또한 안중근은 해외 망명 이래 만주, 연해주 일대에서 끊임없이 구국운동을 전개하면서 독립운동의 철학을 정립할 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동양평화론'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동서양을 떠나 국가와 민족 간의 전쟁과 분쟁의 원인을 제거하자는 것으로, 인종주의에 매몰되거나 세계평화사상과 대치되는 것이 아니었다. 안중근은 한국의 의사만이 아닌 동양과 세계의 의사였다.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외롭게 동양평화를 지켜내고자 했던 안중근의사는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이자 진정한 평화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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