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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시] 서정주 - 꽃밭의 독백

by 소행성3B17 2017.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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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밭의 독백

-사소(娑蘇) 단장(斷章)-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 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

활로 잡은 산(山)돼지, 매[鷹]로 잡은 산(山)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開闢)하는 꽃아.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門)에 기대 섰을 뿐이다.

문(門) 열어라 꽃아. 문(門)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海溢)만이 길일지라도

문(門) 열어라 꽃아. 문(門) 열어라 꽃아. 






  ※ 1958년 6월 '사조' 창간호에 실린 이 작품은 신라 시대의 '사소 단장'이란 설화에서 소재를 구하여 신선 사상(도교)을 배경으로 한 14행의 자유시다.

  이 시는 생의 이상을 영생과 영원의 차원에 두고, 그에의 도달을 신앙적인 염원으로써 노래한 것이다. 이 시의 주제는 구도자의 신앙적 염원이라 하겠다.




서정주 (徐廷柱 1814 ~ 2000)

  회는 미당(未堂). 전북 고창 출생. 중앙불교 전문강원 수학. 해방 후 동아일보 문화부장, 문교부 예술과장 등의 공직과 동아대학, 조선대학교, 서라벌 예술대학, 동국대학 등 교수 역임. 예술원 회원. 1955년 자유 문학상, 1962년 오월 문예상을 각각 수상.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지에서 시 '벽(壁)'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 이어 동인지 '시인부락'을 주재함. 시집에 '화사집(1938)', '귀촉도(1946)', '서정주 시선(1955)', '신라초(1960)', '동천(1968)', '질마재 신화(1975)', '떠돌이의 시(1976)' 등이 있음. 한국 최대의 시인으로서 일반의 존경을 받고 있으며, 사상의 기조는 영원주의, 영생주의, 사조상의 배경은 주정적 낭만주의에, 예술관은 심미주의에 바타을 둔 것을 평가된다.





친일행적

  서정주는 주로 시, 소설, 잡문, 평론 등을 통해 일제에 협력했다. 1942년 7월 13일부터 17일까지 '매일신보'에 평론 '시(詩)의 이야기 - 주로 국민시가(國民詩歌)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을 친일 대열에 합류했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란 또 좋은 술어(述語)가 생긴 것이라고 나는 내심 감복하고 있다. 동양에 살면서도 근세에 들어 문학자의 대부부분은 눈을 동양에 두지 않았다. 몇몇 동양학자들이 따로 있어 자기들의 일상 사용하는 한자의 낡은 문헌들을 자의적(字義的)으로 해석해내는 정도에 그쳤었다. ......시인은 모름지기 이 기회에 부족한 실력대로도 좋으니 중국의 고전에서 비롯하여 황국(皇國)의 전적(典籍)들과 반도의 옛것들을 고루 섭렵하는 총명을 가져야 할 것이다. 동양에의 회구가 성(盛)히 제창되는 금일"이라고 주장한 이 글은 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의 '국민시론(國民詩論)'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 글에서 가리키는 국민시가는 표면적으로 "동방 전통의 계승과 보편성에의 지향"을 추구하고 있으나 내면적으로는 대동아공영권의 논리에 함몰된 것이라 평가된다. 이러한 국민시가론에 입각하여 이련의 친일시를 창작, 발표했다. '국민문학' 1943년 10월호에 발표한 '항공일(航空日)에'는 친일시의 향방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일제가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전쟁동원을 독력하기 위해 제정했던 항공일 행사에 맞춰 쓴 기념시다.  "아아, 날고프구나 날고 싶어 / 부릉부릉 온몸을 울려 / 사라진 모든 것 / 파랗게 걸린 저 하늘을 / 힘차게 비상함은 / 내 진작 품어온 소원!" 여기서 '하늘'을 '천황'의 상징으로 해석할 경우, 이 작품의 시적 화자가 동경하는 '하늘'로의 비상은 '천황'을 정점으로 형성되는 대동아공영권의 질서에 동화되고 싶은 욕구에 다름아니다.

  1943년 11월 16일자 '매일신보'에 '헌시(獻詩)'를 발표했다. 이 시는 '반도학도 특별지원병 제군에게'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학도지원병제도는 일제가 1943년 8월 실시한 징병제외 함께 조선의 청년들에게 황국신민의 의무로 강요된 대표적인 전쟁동원령이다. "교복과 교모를 이냥 벗어버리고 / 성장(星章)의 군모 아래 새로 불을 켠 / 눈을 보자 벗아.... / 오백 년 아닌 천 년 만에 / 새로 불 켠 네 눈을 보자 벗아 ...... // 암 뉘우침도 없이 스러짐 속에 스러져 가는 / 네 위엔 한 송이의 꽃이 피리라. / 흘린 네 피에 외우치는 소리 있어 / 우리 늘 항상 그 뒤를 따르리라." 이와 같이 일제의 침략 전쟁과 학도지원병의 영웅적 전투 행위를 그려내면서 조선 학생들에게 학도지원병 출정을 독려했다.

  '무제 - 사이판 섬에서 전원 전사한 영령을 맞이하며 (국민문학 1944년 8월호)'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사이판 등지에서 일어난 일본 병사들의 옥쇄(玉碎)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어머니여, 저 용맹스런 함성은 저곳이리 / 푸른 혈조가 끊임없이 내려와 / 커다란 목소리, 나를 부른다 // 아아, 기쁘도다 기쁘도다 / 희생제물은 내가 아니면 달리 없으리 // 어머니여, 나 또한 창을 들고 일어서리 / 배를 띄우리 / 사이판으로! / 매킨 타와라로! 아투로!"에 나타난 바와 같이 옥쇄를 감행한 병사들과 하나가 되어 적과 맞서 싸우자고 선동했다.

  1944년 12월 9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송정오장 송가(松井伍長 頌歌)'는 1944년 11월 24일 한국인 출신 소년비행병으로 제일 먼저 카미카제(神風) 특공대로 전사한 인재웅(印在雄, 창씨명 마쓰이 히데오 松井秀雄)을 추모하는 내용이다. "마쓰이 히데오! / 그대는 우리의 신풍특별공격대원 / 정국대원(靖國隊員) // 정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 살아서 벌써  우리에게로 왔느니, / 우리 숨 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 소리 있이 내리는 고운 꽃처럼 /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군함!" 이라고 하여 미국과 영국에 대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조선 병사의 죽음을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위한 영광스런 자기희생인 양 노래했다. 그러나 인재웅은 미군의 포로로 있다가 1946년 1월 10일 미국포로수송선을 타고 인천으로 입항했다.

  수필 '인보정신(隣保精神, 매일신보 1943.9.1~9.10)에서는 이웃간에 일어난 촌극을 통해 일본 국기에 대한 흠모의 정을 그렸다. '스무 살 된 벗에게(조광 1943년 10월호)'와 '징병적령기(徵兵適齡期)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춘추 1943년 10월호)' 에서는 일제의 징병에 젊은이와 어머니들이 적극 부응해야 한다고 선전했다. 특히 '스무 살 된 벗에게'는 "이보다 앞서서 이미 우리들의 선배의 지원병들은 우리들의 것이요 동시에 천황폐하의 것인 그 붉은 피로써 우리들 앞에 모범을 보이어 우리들의 나갈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미 야스쿠니신사의 영령이 된 한 사람의 이인석(李仁錫) 상등병(上等兵)의 피는 절대로 헛되이 흘려져 버리고 말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가나우미. 땅에 흘려진 피는 또한 늘 귀 있는 자를 향하여 외치는 것이라는 것도 총명한 그대는 잘 알 것입니다. 지원병들의 뒤를 이어서 인제부터 젊은 사람들은 스물한 살만 되면 부절(不絶)히 일어서서 일본제국 군인으로서의 자기를 단련해 갈것"이라 하여 지원병의 모범을 따라서 징병에 적극 참여할 것을 강조했다.

  1943년 11월호 '조광'에 '최'씨 성을 가진 조선인 우체부가 군속(軍屬)을 지망하는 과정을 다룬 소설 '최체부(崔遞夫)의 군속지망'을 발표했다. 친일의식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 부분은 작품의 결말 부분이다. "덴노헤이까 반자이(천황폐하 만세)!하고 큰 획으로 맨 처음 줄을 아로새긴 밑에, 신문지를 두 쪽에 낸 것만한 백로지 위에 탄원의 문구가 가득히 쓰이어 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최체부의 소원은 마침내 관계 관원들을 울린 바 있어서, 그의 벗인 해리면 사무소의 가네무라 군과 같이 얼마 후에 두 사람은 군속이 되어 먼 남녘 나라로 떠났다. 최체부는 떠날 달부터 꼭꼭 그의 집에 돈을 부치어, 집안은 전보다 살기에 궁색치 않았고, 마을 사람들의 끝없는 호의와 존경 속에서 최체부의 어머니도 손자를 따라 이침해가 떠오를 때면 규-조-요하이(궁성요배宮城遥拝)를 하는 갸륵한 습성이 생기었다."라고 하여 침략전쟁에 복무하는 것이 부와 명예를 누리는 첩경임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였다. 1943년 10월에 조선군 보도반원 자격으로 조선군의 추계연습에 종군한 체험을 기록한 종군기 '경성사단 대연습 종군기(춘추 1943년 11월호', '보도행(報道行) - 경성사단추계연습(京城師團秋季演習)의 뒤를 따라서(조광 1943년 12월호)', '나의 보도종군(국민문학 1943년 12월호)'을 잇따라 발표했다.


==출처: 친일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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