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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조웅전

by 소행성3B17 2023.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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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웅전

 

      
      
  때는 중국 송나라 문제가 즉위한 지 이십 삼 년이 되는 해였다. 어진 황제를 모신 백성들은 농사짓기에 바빴고 거리에는 평화로운 노랫가락이 흘렀다. 이후 추구월 병인일에 문제께서는 갑자기 충렬묘에 납시었다. 충렬묘란 만고에 다시 없는 충신이었다. 좌승상 조정인이 잠들어 있는 묘였다. 조정인이 이부상서-조선시대의 이조 판서에 해당되는 벼슬-로 있을 때 남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에 조정은 문제를 모시고 뇌성관까지 피했다가 사방으로 다니며 의병을 모집하여 석 달 만에 반란을 진압시켰다. 이 공로로 조정인은 좌승상으로 벼슬이 올랐고 정평왕이란 칭호까지 내렸다. 그러나 좌승상 조정인이 굳이 사양하므로 문제는 하는 수 없이 금자광록대부와 조상만을 제수하고 그의 부인 왕씨는 공렬부인에 봉하였던 것이다.


  그후 여러 해가 지났다. 그러자 간신들이 은밀히 날뛰기 시작하고 어진 신하들이 점점 숨어 살게 되었다. 특히 우승상 이두병이 앞장에서 모함하고 참소하니 좌승상 조정인은 독약을 마시고 자결해 버렸다. 문제는 충신이 허무하게 죽자 크게 애통하여 친히 제문을 지어 조상하시고 충렬묘를 지어 거의 날마다 거동하시었다. 그러나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우승상 이두병은 황제의 이런 거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권세만을 위하여 노력할 뿐이었다. 이두병은 자기의 지위를 반석같이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는 병권을 잡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에 아들인 이 관으로 하여금 병부시랑이란 요직에 앉도록 했다. 이 날도 문제는 충렬묘로 거동하시어 늘 하는 대로 좌승상 조정인의 공적을 극구 칭찬했다. 
  이에 병부시랑 이 관이 엎드려 아뢰기를, 


  "폐하께옵서는 항상 좌승상 조정인의 공로를 찬양하옵시니 신들이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어찌 많은 신하 중에서 조정인 만한 인물이 없다고 생각하시나이까? 폐하가 이처럼 옥안에 슬픔이 가득하시니 이 후로는 충렬묘에 납시는 것을 거두소서." 


  "무엇이? 어허 무엄하도다." 


  황제께서는 괘씸한 생각이 들어 즉시 이 관을 끌어내라고 엄명하셨다. 그리곤 환궁하신 다음에 조종인의 아내 공렬 부인 왕씨를 정렬부인에 봉하시고 많은 금은을 하사하시면서, 


  "듣자 하니 조승상에게 아들이 있다 하니 조정으로 불러서 짐의 마음을 덜게 하라." 


  하고 하교하시었다.


  한편 왕씨 부인은 애를 가진 지 일곱 달에 남편을 여의고 유복자를 낳으니 이름을 웅이라 했다. 왕씨 부인은 삼년상을 지내고도 소복을 벗지 않고 아들 웅을 데리고 세월을 보내었다.


   이 날 황제께서 또 다시 충렬묘에 거동하신다는 말에 더욱 슬퍼하고 있는데 황제가 특별히 보낸 신하가 와서 정렬부인의 칭호와 많은 금은을 전하니 부인은 황공하여 급히 절하며 받았다. 또한 아들 웅을 대궐로 들여보내라는 조서를 보고 더욱 황송하여 깨끗한 옷을 입혀 보냈다. 이때 조웅의 나이 불과 일곱 살이었지만 얼굴은 관옥 같고 행동거지는 어른보다 더 의젓했다. 환관을 따라 옥좌 아래에서 몸을 굽혀 절하니 황제께서 보시고 크게 칭찬하였다.


     "충신의 아들은 과연 다르도다. 짐이 오늘 네 거동을 보니 충효에 벗어나지 않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 또한 나이가 일곱 살이라 하니 태자와 동갑이로다. 어찌 더욱 사랑스럽지 않으랴." 
  이어 태자를 불러오게 하시어 분부하셨다. 


  "조웅은 충신 조정인의 유복자로다. 또한 너와 동갑으로 충효를 겸하였으니 훗날에 국사를 의논하라. 짐은 늙어 여든 살이 가까우니 너희들의 힘이 필요하도다." 


  하시니, 태자도 즐거워하였다. 조웅이 땅에 엎드려 아뢰었다.


   "성은 망극하나이다. 그러나 소신은 나이가 어리옵고 또한 나라에 법도가 있으니 어찌 벼슬길에 오르지도 않은 아이가 대궐 안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폐하께서 이렇듯 어린 아이에게 국사를 의논하시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오리까? 업드려 비옵건대 소신은 물러가서 공부를 마친 후에 다시 용안을 뵈옵게 하소서." 


  그 어조가 지극히 간절하니 비록 어린 아이의 말이지만 황제는 사리에 맞다 하여 하교하셨다. 


  "네 나이 십 삼 세가 되거든 벼슬을 내릴 것이니 가서 열심히 공부하도록 하라."


  조웅이 황공하여 큰 절을 올리고 물러 나오니 태자도 못내 서운해 하였다. 황제께서는 조정의 신하들을 모아놓고 조웅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신 후 물으셨다. 


   "이 관은 지금 어디 있느냐?"
   

  우승상 최 식이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폐하께서 내치라 하시었으므로 지금 옥에 갇히었나이다." 


  하니, 황제께서는 관대한 분부하셨다. 


  "이 관의 말이 경솔하나 이번만은 용서하라."


   원래 이두병에게는 아들이 다섯 있는데 모두 일품의 벼슬에 올라 있으므로 조정의 모든 신하들이 두려워했다. 이 날 황제께서 조웅을 크게 칭찬하심을 보고 이두병의 아들들은 모여 의논했다. 


  "조웅이 벼슬길에 오르면 필시 아비의 원수를 갚으려고 할 것이다. 조심해야 하겠다." 


  마침내 그들은 조웅을 몰래 죽일 흉계를 꾸몄다. 이것도 모르고 조웅은 집으로 돌아와 모친을 뵈오니 정렬부인은 엄숙히 물었다. 


  "그래 폐하를 뵈었느냐?" 


  조웅은 공손히 아뢰었다. 


  "들어가 뵈었나이다." 


  " 그렇다면 황제께서 하문하신 말씀이 있었을 것인데 어떻게 대답했느냐?" 


  조웅은 황제께서 열 세 살이 되면 벼슬을 주시겠다고 하시던 말씀과 태자도 다시 만나기를 원한다고 낱낱이 고하니 부인이 크게 기뻐하였다. 


  "폐하의 은혜가 하늘처럼 높고 바다같이 깊으니 너는 명심해서 충성을 다하여라." 


  "어머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모자는 성은에 거듭 감사하고, 더 한층 몸과 마음을 닦기에 열중했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어느덧 병인년 섣달이 되었다. 이날 황제께서는 온 조정의 신하들로부터 조회를 받고 말하였다. 


  "아, 짐의 나이가 어느덧 여든을 바라보게 늙었구나. 하늘은 짐의 죽음을 재촉하는데 태자의 나이가 어려 국사를 보기에 아직 이르니 어찌할꼬?" 


  그러자 모든 신하들이 엎드려 절하며 아뢰었다. 


  "폐하께서는 아직도 이렇듯 정정 하시온데 어찌 동궁의 어리심을 근심하나이까." 


  이부 상서 정출이 앞으로 나와 간사를 떨었다. 


  "폐하께서는 염려하지 마옵소서. 승상 이두병이 아직 건재하오니 국사는 아무런 근심이 없나이다." 


  모든 신하들이 또한 이두병의 권세를 두려워해 맞장구를 쳤다. 


  "승상 이두병은 한나라의 소무 같은 신하이오니 폐하께서는 근심하지 마옵소서." 


  황제는 신하들이 이처럼 장담하자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대궐 안으로 난데없이 흰 호랑이 한 마리가 들어와 돌아다니다가 궁녀 하나를 물고 후원으로 달아나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에 황제와 모든 신하들은 크게 놀라고 장안의 백성 또한 앞으로 닥칠 길흉을 알지 못해 소동을 피웠다. 황제가 크게 걱정하시니 신하 중의 하나가 나와 아뢰었다. 


  "며칠 동안 북풍이 크게 불고 눈이 산을 덮었으므로 굶주린 호랑이가 내려온 것이니 폐하께서는 근심하지 마옵소서." 


  황제는 이 말에 약간 마음을 놓았으나 웬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때 한림학사 왕열은 사촌누이 되는 왕부인께 이 변고를 편지로 알렸다. 왕부인은 조웅에게 옛날의 역사를 가르치다가 이 편지를 받고 뜯어보았다.


   편지에는 대궐 안으로 흰 호랑이가 들어와 난동을 부린 사실을 자세히 알림과 동시에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풀어 달라고 했다. 왕부인은 이것을 보고 크게 놀라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답서를 써서 보낸 다음에 아들에게 일렀다. 


  "국가에 이런 흉한 재앙이 일어났으니 네가 앞으로 벼슬한다 해도 간신들에게 당하겠구나." 


  조웅이 엄숙한 태도로 아뢰었다. 


  "어머님은 염려마옵소서. 사람의 영욕은 임의로 되는 것이 아니옵고 오직 하늘이 정하는 것이옵니다. 조정에 간신들이 가득해도 소자는 백옥같이 죄가 없사오니 그 누가 저를 모함하겠습니까?"


   왕부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얘야,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산에 불이 나면 옥이나 돌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태우는 법이다. 어찌 간신들이 너를 가만히 두겠느냐?" 


  조웅은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사람이 일을 당하여 오래 조심하면 가슴만 아플 뿐 백 가지 일이 불리하옵니다. 그러나 어머님께서는 너무 근심하지 마옵소서. 설마 하늘이 죄없는 저희들에게 재앙을 내리겠습니까?"


  아들의 활달한 말에 왕부인은 근심하지 않고 묵묵히 집안 일을 돌보았다. 한편 왕부인의 편지를 받은 한림박사 왕 열은 깊이 깨닫는 바가 있어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때는 정묘년 정월 보름이었다. 신하들의 하례가 끝난 다음 황제께서는 갑자기 이르시었다. 


  "전에 짐이 조웅을 보니 충효를 범전하였도다. 해서 태자를 위해 대궐로 데려오고자 하니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이두병이 즉시 앞으로 나와 반대의 뜻을 표했다. 


  "폐하, 그건 아니 되옵니다. 벼슬 없는 아이를 조정에 두는 것은 법도에 없나이다." 


  폐하께서는 불쾌한 안색을 지으셨다. 


  "충효한 인재를 거두는데 어찌 법도를 따지는가?"


  이두병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조웅을 깎아 내렸다. 


  "인재를 얻고자 하시면 장안에서만도 조웅보다 십 배나 더한 충효스런 인재가 수백이요, 조웅과 같은 아이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사옵니다." 


  황제께서는 불쾌한 나머지 옥좌를 박차고 들어가셨다. 그러자 이두병이 뭇신하들을 돌아보고 엄포를 놓았다. 
  "만약 조웅에 대해 좋게 아뢰는 사람이 있으면 좋지 못할 것이오." 


  이렇게 되니 겁내지 않는 신하가 그 누구이겠는가. 이 때 왕부인과 조웅은 우연히 이두병이 말한 것을 듣고 앞으로의 일이 크게 잘못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드디어 불행이 닥쳤다.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황제께서는 뭇백성들이 축원한 보람도 없이 정묘년 삼월 삼일에 승하하시었다. 이에 온 조종의 신하들과 천하의 백성들이 슬피우니 천지에 사무쳤다. 왕부인과 조웅의 슬픔은 그 누구보다 컸다. 문제가 돌아가시니 세상은 온통 이두병의 마음대로였다. 조정의 뜻 있는 신하들은 하나 둘 사직하고 떠나니 간신들만 우글우글했다. 백성들은 나라가 망할 조짐이라고 속으로 한탄할 뿐 그 누구도 감히 나서서 이두병의 죄악을 꾸짖지 못했다. 그러나 기회가 왔다가 생각한 이두병은 시월 십삼 일에 드디어 만조 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본색을 드러냈다. 


  "지금 태자의 나이 겨우 여덟 살이니 황제의 자리에 앉는 것은 불가하다. 나라에는 하루도 주인이 없으면 곧 시드는 법이니 그대들은 어찌하겠는가?"


   온통 이두병의 패로 이루어진 신하들은 미리 짜여진 각본대로 저마다 떠들어 댔다.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덕이 있는 사람의 것입니다. 나라가 지금 위태로운데 어찌 여덟 살밖에 안 되는 태자가 즉위할 수 있으리오, 그러니 승상께서 옥쇄를 받으시고 즉위하십시오." 


  그러자 이두병은 짐짓 세 번 사양하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장안이 온통 놀라 버렸다. 그러나 이두병의 군사들이 곳곳에 서서 위세를 떨쳐 감히 항거하는 자가 없었다. 이두병은 자칭 순제라 일컫고 국법을 제 마음대로 개정하고 동궁을 폐하여 외각관에 감금하니 충성스런 신하들은 남몰래 피눈물을 흘렸다. 이 때 왕부인은 이두병이 드디어 나라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자 통곡하며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었다. 


  "슬프구나! 나라가 망했는데 옹의 나이 겨우 팔 세이니 어찌할 것인가?" 


  조웅이 급히 들어와 모친을 애써 위로했다. 


  "어머님께서는 불효자를 근심하지 마옵시고 몸을 보호하소서. 이두병은 아버님을 해친 원수이자 대역적이옵니다. 소자가 비록 나이 어리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어찌 역적의 손에 죽겠습니까?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그러나 조웅의 눈에서도 분노의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한편 이두병은 맏아들 이 관을 동궁으로 삼고 연호를 건무 원년이라 했다. 그리고 외각관에 감금한 송태자는 태사부 계량도로 귀양보냈다. 왕부인과 조웅은 태자가 귀양간다는 소식에 매우 슬퍼하며 또한 분노했다. 그들은 태자를 따라가고 싶었으나 역적들의 눈에 띄면 죽을 것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하루는 조웅이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여 모친 모르게 장안 큰 거리로 돌아다니었다. 그러다가 한 곳에 이르니 어린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는데 뜻이 묘했다. 


  "나라가 망했으니 아비 없는 난세로다. 문제가 순제 되고 태평 세월이 어지러운 세상으로 변했구나 그러나 남의 것 빼앗아 사는 자가 그 며칠이나 갈 것인가. 충신의 피눈물이 흐르니 역적은 망하는도다. 사해에 숨어 놀다가 시절이 좋아지면 다시 만나리." 


  조웅이 듣고 나서 자기도 모르게 피눈물을 흘리며 어느덧 대궐 경화문에 이르렀다. 인적은 고요하고 달빛은 교교히 흐르는데 저절로 돌아가신 황제의 따뜻한 정이 생각났다. 조웅은 당장이라도 대궐 안으로 들어가 역적 이두병을 죽이고 싶었지만 수많은 군사들이 곳곳에 지키고 있으니 감히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분노가 너무 치밀어 품속에서 붓을 꺼내 이두병의 죄상을 욕하는 글을 써서 몰래 경화문에 붙였다. 이 때 왕부인은 잠을 자다가 한 기이한 꿈을 꾸었다.


  돌아가신 승상이 생시의 모습으로 나타나 엄히 이르는 것이 아닌가. 


  "부인은 어서 일어나시오. 날이 밝으면 큰 변이 생길 것이니 어서 웅을 데리고 도망하시오." 


  부인이 놀라 급히 물었다. 


  "천지에 역적이 깔리었거늘 어디로 가란 말씀이십니까?" 


  그러나 대답이 없어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이때 황급히 아들을 부르니 간 곳이 없었다. 왕부인은 다급한 마음에 문 밖을 나와 살피니 조웅이 총총히 걸어오는 것이었다. 


  "얘야, 이렇듯 깊은 밤에 어디를 갔었느냐?" 


  모친이 묻자 조웅은 사실대로 말했다. 


  "소자는 이두병의 죄악이 너무 크므로 경화문에 가서 역적을 욕하는 글을 써서 붙였사옵니다." 


  모친이 크게 놀라 엄히 꾸짖었다. 


  "네 어찌 이렇듯 경망스러우냐? 그렇지 않아도 역적이 우리 모자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는데 그 글을 보면 만사를 젖혀놓고 우리를 죽이려고 할 것이다. 다행히 너의 아버님께서 꿈에 나타나 알리셨으니 어서 도망가자." 


  두 사람은 즉시 간단한 행장을 차린 다음 충렬묘로 달려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제단 위의 초상화에 땀이 나서 얼굴에 물기가 축축했다. 모자는 크게 울지도 못하고 엎드려 흐느끼니 그 형상이 가련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초상화를 떼어 간수하고 모자는 수십 리를 걸어 어느 강가에 도착했다. 날씨는 험악하여 물결은 거친데 사공 없는 나룻배만이 덩그렇게 매어져 있었다. 모자가 황급히 배에 올라 노를 저었으나 매여있는 배가 어찌 움직이겠는가. 일이 이렇게 되니 왕부인과 조웅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당장이라도 이두병의 군사들이 몰려와 꼼짝없이 잡힐 것만 같아 발을 동동 굴렀다. 이때 갑자기 상류 쪽에서 한 조각배가 등불을 밝히고 이쪽으로 쏜살같이 오는 것이 보였다. 왕부인은 크게 기뻐하여 목청껏 외쳤다. 


  "사공께서는 제발 우리들을 살려 주십시오." 


  그러자 조각배가 모자 곁에 이르더니 늙은 사공이 재촉하는 것이었다. 


  "두 분은 어서 배에 오르십시오." 


  모자가 반겨 배에 오르자 사공은 있는 힘을 다해 배를 저었다. 왕부인은 마음이 약간 진정되자 사공에게 물었다. 


  "사공께선 어인 일로 이 밤중에 배를 몰고 내려왔습니까?" 


  늙은 사공은 웃으며 대답했다. 


  "이렇듯 깊은 밤중에 누가 배를 몰겠습니까? 다만 꿈에 한 귀인이 나타나셔서 급히 이리로 와서 사람을 구하라고 하시기에 달려왔을 뿐입니다." 


  사공의 얘기를 듣자 모자는 하늘의 도우심에 깊이 감사드렸다. 이윽고 날이 희미하게 밝을 무렵 조각배는 낯선 강가에 닿았다. 왕부인은 사공에게 깊이 감사를 드리고 아들의 손목을 잡고 정처 없이 걸어갔다. 한편, 이두병의 대궐에서는 큰 야단이 났다. 날이 밝자 경화문을 지키던 포졸이 당황한 기색으로 들어와 아뢰는 것이었다. 


  "날이 밝았기에 보니 문에 이런 글이 붙어있기에 가져왔나이다."


  '송화실이 약해지니 역적이 조정에 가득 찼도다. 불행히 황제께서 돌아가시니 소인들이 득세하여 태자를 모반하고 역적 이두병에 붙었도다. 만고 역적 이두병은 듣거라. 너는 성은을 입어 벼슬이 일품에 이르렀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역적이 되었느냐? 네 죄악을 생각하면 천하 만민이 살을 씹고 뼈를 갈아도 부족하리라. 내 어느 때건 너를 잡아 만백성 앞에서 목을 베어 역적의 최후가 어떠한지를 보여줄 것이다. 전조 충신 조종인의 유복자 조웅'


  이두병은 이 글을 읽자 크게 노하여 하늘이 얕다고 호령했다. 
  "즉시 조웅 모자를 결박하여 잡아들여라." 


  그러자 때는 이미 늦어 조웅의 집으로 달려갔을 때는 텅텅 빈 집이었다. 이에 더욱 화가 난 이두병은 군사를 풀어 조웅의 행방을 찾는 한편 충렬묘로 사람을 보내 조종인의 초상화를 가져오라고 했다. 하지만 충렬묘의 초상화까지 감쪽같이 없어졌다는 보고가 아닌가. 이두병은 너무 분한 나머지 아무 죄없는 대궐 문지기의 목을 베어 성문에 높이 달아 놓았다. 이에 조웅이 살던 집과 충렬묘를 불살라 버리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래도 이두병이 화가 풀리지 않아 호통을 치자 뭇 신하들이 좋은 말로 아뢰었다. 


  "조웅의 나이 겨우 여덟이고 그 어미는 늙은 여인이니 멀리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천하에 명을 내려 잡으라고 하면 머지않아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옵니다." 


  이에 이두병은 천하에 영을 내리기를 만약 조웅 모자를 잡아오는 자가 있으면 천금의 상과 만호후의 벼슬을 주겠다고 했다.


  이런 소동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웅 모자는 정처 없이 걷다가 소나무와 대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선 한 깨끗한 고을에 이르렀다. 마을에 들어서 보니 사람들의 행동이 매우 유순하고 깨끗했다. 이에 한 사람을 붙잡고 하룻밤 지내기를 청하니 쾌히 한 집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 집에 들어가니 나이 많은 할머니가 어린 처녀를 데리고 살거늘 매우 조용했다. 주인 되는 노파가 물었다. 


  "부인은 어디 사시며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왕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저희 모자는 변을 당해 이처럼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무엇이라 부르는 고을입니까?" 


  "이곳은 계량섬 백자촌이라는 마을입니다." 


  주인 노파는 대답하고 나서 모자에게 따뜻한 식사를 대접하니 왕부인은 감사해 마지않았다. 노파는 사양하며 자기 신세도 조웅 모자와 비슷하니 이곳에 함께 살자고 했다. 이에 조웅 모자는 그 집에서 머물렀으나 마음은 항상 고향과 빼앗긴 나라에 가 있었다. 이윽고 한 해가 속절없이 가니 부인의 나이는 마흔 살이요, 조웅은 아홉 살이 되었다. 하루는 주인 노파가 왕부인에게 오더니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부인은 아직 마흔 살밖에 안 되었으니 개가토록 하십시오. 내 사촌 남동생이 있는데 젊어서 상처하고 지금 마땅한 곳을 정하지 못해 널리 사람을 구하고 있습니다. 남동생에게는 재산도 많으니 부인이 개가하면 큰복을 누리리다." 
  왕부인이 놀라 얼굴빛을 바꾸고 쌀쌀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를 길거리의 여자로 취급하다니... 나는 남은 생애를 아들을 위해 바칠 것이니 아예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주인 노파는 사죄하며 얼른 물러났다. 하지만 몰래 사촌 남동생에 좋은 혼처가 생겼다고 연락했다. 사촌 동생되는 자는 크게 기뻐하여 어떻게 하든지 왕부인을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호시탐탐 노렸다. 왕부인은 이런 기색을 깨닫고 더 이상 이곳에 있으면 큰일나겠다고 생각했다. 해서 조웅과 함께 노파가 잠든 사이에 집을 나서 다시 정처없이 길을 떠났다. 들을 지나 수십 리를 걸으니 어느덧 발도 붓고 가지고 온 식량도 떨어져 굶주림이 심하였다. 모자는 별 수 없어 길가에 앉아 잠시 쉬었다. 이때 그들 곁에 마침 말을 탄 길손이 지나거늘 조웅이 앞으로 나아가 절을 하고 도움을 청했다. 


  "길을 가다가 피곤에 지쳐 있으니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자 길손은 말에서 내려 대답했다. 


  "가진 것이라곤 마른 음식이 조금 있으니 어서 요기를 하라." 


  조웅이 인사를 하고 마른 음식을 받아 모친과 함께 요기하니 겨우 살아날 수가 있었다. 다시 며칠을 걸어 한 곳에 이르니 해상현 옥구라는 곳이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모여 수근거리기를, 


  "새 황제가 천하에 이르기를 조웅 모자를 잡아 바치면 천금상과 만호부에 봉한다 하니 우리가 그들을 잡으면 크게 복을 누리리라." 


  하고, 오가는 행인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조웅 모자는 이 말을 듣고 간담이 서늘하여 급히 마을에서 도망쳤다. 너무 급히 도망치는 바람에 발도 아픈 줄을 몰랐다. 이윽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모자는 신세를 생각하니 눈물이 비오듯 흘러 서로 붙들고 울었다. 


  "이제는 어디로 가도 역적의 손에 잡혀 죽겠구나." 


  때는 꽃피는 춘삼월이어서 나무마다 새 잎이 돋았는데 모자의 신세는 더욱 처량하기만 했다. 바위를 의지하여 밤을 지내는데 부엉이는 울고 늑대는 사방에서 울부짖어 사람의 마음을 더욱 고달프게 했다. 왕부인은 아들을 끌어안고 연신 눈물만 흘리니 달빛조차 함께 슬퍼하는 듯했다. 밤을 지새며 굶주림을 참자니 몸이 더욱 무거워져 왕부인은 자기도 모르게 누워 버렸다. 이에 조웅이 꽃을 꺾어다가 모친에게 드리니, 


  "이게 어찌 요기가 되겠는가?" 


  하고 탄식하고 있는 어디선가 갑자기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살피니 오륙 명의 여승들이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왕부인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여승님께서는 어느 절에 있으며 어느 절로 가나이까?" 


  여승 중의 하나가 의아스런 어조로 반문했다. 


  "부인은 뉘신데 이렇듯 깊은 산중에 와 있습니까?" 


  왕부인은 애처로운 얼굴로 사실대로 대답했다. 


  "저희 모자는 길을 잃고 이곳에 들어왔다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여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여승들은 저마다 보따리를 끌어 음식을 내주었다. 조웅 모자는 절하며 치하했다. 


  "죽을 사람을 구해 주시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여승들은 사양하며 길을 가리켜 주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인가가 있으니 그리로 가십시오." 


  모자는 그들과 헤어지자 허겁지겁 요기를 했다. 이윽고 기운을 차리자 조웅은 다시 길을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왕부인이 울며 말했다.


     "얘야, 어디로 가겠다는 거냐? 마을도 가면 반드시 관리들에게 잡힐 것이다. 역적에게 끌려가 죽느니 차라리 이 산중에서 굶어 죽는 것이 나을 것이다." 


  조웅은 애써 밝은 표정으로 모친을 위로했다. 


  "사람의 목숨이 하늘에 달려 있으니 하늘이 죽이면 죽을 것이오, 살리면 살 것이옵니다. 어찌 사람이 두려워 이 산중에서 굶어 죽거나 짐승의 밥이 되겠습니까?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고 마을로 내려가십시오." 


  왕부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얘야, 우리 모자가 이렇게 가면 반드시 행적이 드러나 잡힐 것이다. 이 어미의 생각으로 우리가 행색을 달리하면 좋을 것이다." 


  "어떻게 말입니까?" 


  "나는 삭발하여 여승이 되고 너는 상좌 - 중의 수업을 닦는 남자아이 - 가 되면 누가 알겠느냐?" 


  "어머님, 목숨을 건지는 것도 중하지만 어찌 머리카락을 없애겠습니까?" 


  "얘야, 머리를 깎는다고 해도 중이 아니니 상관 있느냐? 너는 조금도 걱정하지 말아라." 


  조웅은 모친의 결심이 굳은 것을 보고 결심했다. 


  "그렇다면 소자도 머리를 깎겠습니다." 


  "얘야, 너같이 어린아이가 삭발하면 도리어 의심할 것이다. 이 어미만 깎을테니 너는 더 이상 말하지 말아라." 


  왕부인은 엄히 이르고 행장에서 가위를 꺼내 머리를 깎으라 하니 조웅이 차마 가위질을 할 수가 없어 눈물만 흘렸다. 이를 본 모친이 크게 꾸짖었다. 


  "이 어미가 여지껏 산 것은 오로지 너 때문이다. 그런데도 너는 이 어미를 위로해 주지는 못할망정 울고만 있으니 어떻게 원수를 갚고 나라를 되찾겠느냐?" 


  이에 조웅은 억지로 울음을 그치고 가위를 들어 모친의 머리를 깎으니 간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얘야, 울지 말아라. 내 마음도 아프구나." 


  왕부인이 위로하니 조웅은 눈물을 씻으며 말했다. 


  "어머님, 소자는 오늘을 잊지 않고 반드시 역적을 없애겠습니다." 


  머리를 다 깎자 왕부인은 행장에서 옷을 꺼내어 장삼을 지어 입고 머리에 여승이 쓰는 고깔을 쓰니 완연히 모습이 달라졌다. 그리곤 조웅을 앞세우고 마을로 내려오니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집집마다 들러 밥을 빌어먹고 가다가 하루는 한곳에 장이 섰으므로 깎은 머리카락을 팔았다. 머리 값으로 겨우 돈 닷 냥을 받아 이날 밤은 객점에서 잤다. 그런데 밤이 깊은 후에 갑자기 마을이 떠들썩했다. 조웅 모자가 놀라 나와보니 도적들이 흉기를 들고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왕부인은 놀라 담을 뛰어 넘어 도망하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조웅이 없었다. 부인은 간담이 떨어지는 듯하여 마을을 돌아보니 불길이 온통 마을을 휩쓸고 도적들이 여기저기서 날뛰는 것이었다. 이어 도적이 한사코 뒤를 쫓으니 왕부인은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자꾸만 도망쳤다. 얼마쯤 도망치다가 보니 한 채의 낡은 묘가 있기에 비석 뒤에 숨었다. 한편 조웅은 북새통에 모친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이때 도적이 달려들어 봇짐을 빼앗으려 하니 붙들고 애걸했다. 


  "봇짐 속에는 돈 몇 푼이 있으니 그것만 가지고 가고 짐은 남겨 주십시오." 


  그러자 한 늙은 도적이 불쌍히 여겨 짐 속에서 석 냥의 돈과 초상화만 꺼내고 봇짐을 내주었다. 조웅은 이를 보고 애절히 부르짖었다. 


  "나를 죽이고 그 초상화를 가져가시오!" 


  도적이 크게 의아하여 물었다. 


  "도대체 이것이 누구의 초상화냐?" 


  "나는 보다시피 상좌인데 우리 대사께서는 늘 불상을 모시고 다닙니다. 오늘도 대사를 모시고 객점에 들어갔다가 혼란 중에 서로 헤어졌으니 만약 이 불상마저 가져가면 나는 절에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가져가도 소용없는 불상은 이리 주십시오." 


  조웅이 거듭 애원하니 늙은 도적이 여러 도적들에게 권하여 돌려주었다. 조웅은 초상화를 받자 물었다. 


  "어디로 가면 저의 대사님을 만나겠습니까?" 


  "그 여승 말이냐? 저쪽 길로 갔으니 그리로 가 보아라." 


  조웅은 크게 기뻐하여 도적이 가르킨 길로 달려가면서 모친을 불렀다. 이 때 왕부인은 비석 뒤에서 잠깐 졸고 있는데 꿈에 남편이 나타나 빨리 일어나라고 해서 깜짝 놀라 깨어났다. 그러자 묘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부인이 크게 기뻐하여 불렀다. 


  "웅이냐?" 


  조웅이 듣고 급히 들려와 외쳤다. 


  "어머님, 소자 웅이옵니다." 


  모자는 다시 만난 기쁨에 서로 붙들고 울고 웃고 했다.


  이윽고 날이 새자 비석의 글자가 뚜렷하게 보이거늘 조웅 모자는 무심코 이를 읽었다.거기에는 금빛 글자로, <만고충신 병부시랑 겸 진부어사 조종인의 불망비라> 씌어 있었고 밑에는 작은 글자로, 

 

  <황제께서 밝히 살피사 위왕은 죄주시니 모두가 조승상의 공이로다. 흩어진 백성들이 다시 모여 성덕을 찬양하니 이 은덕 무엇으로 갚을꼬>

 

  라고 씌어 있었다. 조웅 모자가 이 비문을 보고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니 산천 초목이 함께 흐느끼는 듯 빛을 잃었다. 조웅이 겨우 눈물을 삼키고 모친께 여쭈었다. 


  "아버님 비석이 어찌하여 이곳에 있나이까?" 


  모친이 천연한 안색으로 대답했다. 


  "아, 이 비석을 보니 이곳이 위나라 땅이구나. 네 부친이 병부시랑을 지낼 때에 위왕 두침이 포악한 왕으로 천하 만인이 미워했었다. 백성들이 이에 참을 수가 없어 고향을 등지고 사방으로 떠나니 황제께서는 네 부친을 보내어 위왕을 벌주시고 다시 살기 좋은 땅으로 만드셨단다. 이곳 백성들이 이 은공을 잊지 못하고 네 부친의 비를 세웠구나." 


  이에 붓을 꺼내어 비문을 베낀 다음 하직했다. 그러나 이 천지에 어디로 간단 말인가. 더구나 푼돈마저 도적에게 빼앗겼으니 앞길이 아득하기만 했다. 조웅이 모친에게 아뢰었다. 


  "다시 마을로 다니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니 절을 찾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부인도 이를 옳게 여겨 길가는 사람에게 절이 있는 곳을 물었다. 


  "여기서 서쪽으로 쭉 가시오." 


  길손이 가리켜 준 대로 모자는 험한 산중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먹을 것이 없어서 허기에 지쳐 산골짜기에 앉아 쉬는 시간이 많았다. 이때 한 늙은 중이 철장을 짚고 다가오더니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매우 시장한 것 같아 보이니 우선 이것으로 요기나 하십시오." 


  조웅 모자는 염치 불구하고 음식을 받아 요기하고 감사를 드렸다.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 굶어 죽을 뻔했는데 인자하신 대사님을 만나 살았으니 은혜를 잊을 수 없나이다." 
  그러자 늙은 중이 웃으며 말했다. 


  "조금 요기하신 것을 은혜라 하신다면 빈승은 부인에게서 천금을 얻었으니 그 은혜는 어찌하오리까?" 
  부인이 놀라 물었다. 


  "저는 본래 가난한 여승으로 사방에 다니며 빌어먹는 신세인데 어찌 천금의 재물을 대사님께 주었다고 말씀하나이까?" 


  늙은 중이 엄숙한 얼굴로 도리어 반문했다. 


  "부인께서는 조충공의 부인이 아니시옵니까? 이렇게 변장 하신들 빈승이 모르시겠습니까?" 


  조웅 모자는 크게 놀라 속으로 부르짖었다. '우리의 본색이 탄로되었으니 어찌할 것인가.' 왕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애걸했다. 


  "대사님, 우리 모자를 잡아 관청에 바치면 천금의 상과 만호후의 벼슬을 받겠지만 부귀는 뜬구름 같은 것이니 부디 저희들을 놓아주소서." 


  늙은 중은 웃으며 대답했다. 


  "부인께서는 안심하십시오. 빈승은 부인을 잡아가려는 것이 아닙니다. 빈승은 지난달 승상의 화상을 그렸던 중 월경이옵니다. 그때 승상의 화상을 그려 부인께 바쳤더니 천금의 상을 주셨기에 가지고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부인께서는 빈승을 몰라보십니까?" 


  이 말을 듣고 왕부인은 늙은 중을 자세히 살피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그런 일이 있지만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없습니다. 대사께서는 저희들을 농락하지 마시고 본심을 얘기하옵소서." 
  그러자 늙은 중은 엄숙히 말했다. 


  "부인께서는 우선 초상화를 내주소서." 


  왕부인은 더욱 놀라 완강히 부인했다. 


  "떠돌아다니는 사람에게 무슨 초상화가 있겠습니까, 대사께서는 사람을 놀리지 마십시오." 


  "부인께서는 어찌 이렇게 의심하십니까? 그때 빈승이 부인을 뵈올 적에 임신하신 지 여러 달 되었기에 앞으로 닥칠 일을 초상화 뒤에 써 넣었으니 어서 꺼내어 살펴보십시오." 


  늙은 중의 간곡한 말에 왕부인은 이상하게 생각되어 마침내 초상화를 꺼내어 뒤에 붙어 있는 종이를 떼어 살펴보았다. 과연 거기에는 깨알같은 글씨로, 

 

  <충신의 부인은 어인 일로 머리를 깎으셨는가? 도둑에게 망한 나라 바닷가에 거북을 만났도다. 주인은 누구인고? 굴원 - 초나라의 충신으로 물에 빠져 죽음 - 의 넋이로다. 뱃속에 있는 아이 충신 열사로다. 아들로 상좌를 삼고 모습을 고치려 해도 어찌 옛일을 잊겠는가. 위나라 강서 출신 월경>

 

  라고 씌어 있었다. 왕부인은 놀랍기도 하고 기쁨에 겨워 울며 말했다. 


  "우리 모자는 나라를 도둑질한 역적을 피하다가 천행으로 이곳에서 대사님을 뵈었으니 이 기쁨을 어찌 말로써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월경대사가 좋은 말로 위로했다. 


  "부인께서 고생하신 것을 빈승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존귀하고 비천하게 되는 것은 모두가 하늘의 뜻이니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빈승은 이렇게 만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나이다."


  라고 말하고는, 조웅 모자를 데리고 산골짜기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 있고, 맑은 냇물이 구불구불 흐르다가 폭포를 이루고 있었다. 이윽고 돌다리를 건너 절간에 이르니 많은 중들이 나와 반가이 맞이했다. 조웅 모자는 고생 끝에 이렇게 신선이 사는 듯한 선경에 이르니 마음이 절로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왕부인은 경내에 이르자 거듭 감사를 드렸다. 


"속세에서 때가 묻은 저희 모자가 극락을 어지럽힌 듯하니 마음이 불안하옵니다." 


  그러나 모든 중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누추한 곳에 귀한 분이 오시니 더욱 영광이옵니다." 


  "저희들은 가난하여 그저 비바람이나 피할 수 있는 암자에 살고 있었는데 월경대사께서 서울에 가셨다가 부인께서 천금을 주신 것을 가지고 오셔서 절을 지었나이다. 저희들이야말로 부인의 은혜를 어찌 다 갚겠습니까?" 


  "원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작은 것을 시주하고 이렇듯 큰 인자를 받으니 도리어 부끄럽습니다." 


  서로 얘기를 나누며 별당에 이르니 왕부인이 앞으로 거처할 곳이었다. 월경대사는 조웅을 데리고 글을 가르치는 한편 신통한 술법도 아낌없이 전해 주었다. 조웅은 본래 영특하고 민첩한지라 한 가지를 가르쳐주면 열 가지를 깨우쳤다. 이에 왕부인은 편안한 마음으로 아들의 성장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조웅의 나이 어느덧 열 다섯 살이 되었다. 이제는 누가 보아도 생김새가 뛰어나고 기골이 장대한 대장부였다. 하루는 조웅이 모친을 뵙고 아뢰었다. 


  "소자의 나이 열 다섯 살이 되었나이다.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한 곳에서 보낼 것이 아니라 천하를 두루 다니며 세상 구경도 하고 서울의 일도 알고 싶사오니 허락하여 주소서." 


  왕부인은 듣고 크게 놀라 거듭 말했다. 


  "만리 타향에 와서 오직 너만을 믿고 살아왔는데 어찌 이 어미를 두고 떠나려고 하느냐? 네가 떠나겠다면 이 어미도 같이 가겠다." 


  조웅은 더 이상 여쭙지 못하고 스승인 월경대사에게 의논을 드렸다. 


  "제가 모친께 세상에 나아가 역적의 소식도 듣고 그 간의 형편을 알고자 했더니 꾸중만 들었습니다. 부디 스승께서는 어머님의 마음을 돌리시어 제 뜻을 펴게 해주십시오." 


  월경대사도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생각하던 중이라 쾌히 응낙했다. 그리하여 며칠 뒤에 왕부인을 찾아가 조웅의 뜻을 아뢰니 부인은 벌써 안색이 어두워졌다. 


  "대사님의 말씀은 옳습니다만 옹의 나이 아직 이십도 안되었는데 어찌 홀로 보낼 수 있겠습니까?" 


  월경대사가 웃으며 말했다. 


  "부인께서는 어찌 그리 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빈승이 웅의 길흉을 짐작하지 못하면 절대로 내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왕부인은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만약 대사님의 예측이 빗나가면 어찌하겠습니까?" 


  "그건 염려하지 마십시오. 빈승이 웅의 일생을 짐작하는 것쯤은 감히 장담하겠습니다." 


  이에 부인은 마지못해 허락했다.
 
   조웅은 크게 기뻐하여 이튿날 아침 모친과 스승, 그리고 여러 중들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산을 내려왔다. 몇 년만에 세상에 나오니 조웅은 기분이 날아갈 듯하여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이리하여 천하를 돌아다니며 구경하기를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 하루는 강호라는 곳에 이르니 무척 큰 고을이어서 사람이 분주하게 오가고 상점이 즐비했다. 한참 구경하다가 한 곳에 이르니 머리가 눈같이 흰 노인이 다 떨어진 옷에 검은 띠를 두르고 앉아 있었는데 아무래도 범상치가 않았다. 특히 조웅의 눈에 띈 것은 백발노인의 앞에 놓인 장검이었다. 이 장검은 보기에는 웅장하여 저절로 욕심이 생겼으나 수중에 돈이 없으니 멀리서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람들이 칼을 사려고 해도 백발노인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었다. 날이 저물자 백발 노인은 장검을 들고 가버렸다. 조웅은 객점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으나 백발노인의 칼이 머리를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튿날 조웅은 아침 식사도 잊은 채 백발노인이 앉았던 곳으로 달려갔다. 백발노인은 벌써 나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칼 이외에도 벽에 글귀를 써 붙였는데 살펴보니 이런 내용이었다. 

 

  <화산도사의 한쪽 소매가 무거우니 행색이 칼 파는 노인 같다. 사람마다 칼 값을 물으니 노인이 이르되, 내 기다리는 자 있도다. 앞으로 만 사람이 와도 팔기를 원치 않노라. 아, 조웅의 소식을 누구에게 물어볼 것인가, 기다리는 사람은 어이해서 오지 않는고.>

 

  조웅은 글을 다 읽자 크게 놀라 백발노인에게 절했다. 백발노인은 한참 살피더니 조웅의 손을 잡고 물었다. 


  "그대 이름이 조웅인가?" 


  조웅은 공손히 대답했다. 


  "제가 바로 조웅이옵니다. 어르신네께서는 어떻게 저의 이름을 아시는지요?" 


  백발노인은 크게 기뻐하며 대답했다. 


  "그야 자연히 알고 있지. 하늘이 보검을 주시었으므로 임자를 찾아내고 온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얼마 전에 큰 별이 강호에 비쳤기에 이곳에 와서 기다렸다. 어제 그 별이 더욱 비치므로 자네가 나타날 줄 알고 글을 써서 알렸다." 


  하면서 보검을 주었다. 조웅은 보검을 공손히 받아 살펴보니 길이가 석 자요, 그 가운데는 금빛 글자로 <조웅검>이라고 뚜렷이 씌어져 있었다. 조웅은 머리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귀한 보검을 주시니 이 은혜를 죽어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 보검은 그대의 것이다. 나는 다만 전해 주었을 뿐이니 어찌 은혜라 할 수 있겠는가?" 


  백발노인은 말하고 나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대의 앞길은 창창하니 부디 큰 공을 세우라."


  조웅이 무척 섭섭해 하니 백발노인은 다시 말했다. 


  "여기서 남쪽으로 칠백 리를 가면 관산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그 산중에 천명도사라는 분이 계시다. 네 정성이 지극하면 만날 수가 있으니 어서 여기를 떠나거라." 


  하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조웅은 백발노인이 가르쳐 준대로 남쪽으로 떠나 며칠만에 관산에 도착했다. 산중으로 들어가니 깎아 세운 듯한 절벽 밑에 아담한 초가집이 있었다. 그리고 주위에는 맑은 연못이 있어 연꽃이 만발하고 이름모를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조웅이 들어가 사람을 찾으니 흰 수염을 가슴까지 드리운 신선 차림의 천명도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와 맞이했다. 조웅이 엎드려 절하고 뵈오니 천명도사가 크게 기뻐하며 이르기를, 


  "내 너를 기다린 지 오래다. 하늘의 뜻을 따라 내 너에게 모든 것을 가르칠 것이니 힘써 배우라." 


  하거늘, 조웅이 제자의 예를 베풀고 그날부터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먼저 육도삼략을 익힌 다음 천문 지리를 담은 천문도를 배우니 조웅은 눈앞이 트이는 듯하여 침식을 잊고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


  하루는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쯤에 갑자기 거센 바람이 크게 일어나고 벼락치는 소리가 산중의 고요를 깨뜨렸다. 조웅이 놀라 천명도사에게 까닭을 물었다. 


  "스승님, 이게 무슨 변입니까?" 


  천명도사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이 산중에는 한 마리의 천마가 있는데 어찌나 날쌔고 용맹한지 구름을 부르고 바람을 일으키는구나. 너는 나가서 이 천마를 얻도록 하여라." 


  조웅이 크게 기뻐하여 나가보니 과연 한 마리의 천마로 전신의 털이 불꽃처럼 붉었다.


  그리고 절벽 사이를 비호처럼 뛰어다니는데 바람 소리가 윙윙 날 지경이었다. 조웅이 이를 보고 크게 외쳤다. 


  "네 어찌 임자를 모르고 날뛰느냐?" 


  그러자 적토마는 조웅을 뒤돌아보더니 반가운 듯이 달려와 울어댔다. 조웅은 말의 목을 몇 번 쓰다듬어 주다가 조웅을 뒤따라 나와 지켜보고 있는 천명도사에게 말했다. 


  "스승님께서는 저를 위해 미리 말까지 마련해 주셨군요?" 


  "하하하... 이 천마는 네가 앞으로 행동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하늘이 낸 물건은 임자가 있는 법이니 너는 내게 감사할 필요는 없느니라." 


  천명도사는 가볍게 웃어넘기며 더욱 힘을 다해 신통한 술법을 가르치니 조웅의 무술은 날로 눈부시게 뛰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조웅이 스승에게 나아가 여쭈었다. 


  "어머님을 객지에 두옵고 오랫동안 뵙지 못했으니 잠깐 찾아 뵈옵고 오겠습니다." 


  천명도사는 허락하고 빨리 돌아오라고 말했다. 조웅이 하직하고 적토마에 올라 한 번 채찍질하고 바람같이 달려갔다. 어느 새 칠백 리 밖의 강호에 이르러 한 객점에 들어가 쉬었다. 이 객점은 위나라 장진사의 집인데 진사는 일찍이 죽고 그 부인이 홀로 딸 하나만을 데리고 사는 집이었다. 그 진사의 딸이 인물도 아름답고 학문에도 뛰어나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해서 그 모친은 딸에 어울리는 훌륭한 신랑을 얻고자 객점을 차리고 오가는 길손을 청하여 은근히 인물을 구경하던 참이었다. 이날 조웅이 들어가니 부인이 계집종에게 어떤 손님이냐 물었다. 


  "마님, 어린 나그네이옵니다." 


  계집종은 간단히 대답했다. 부인은 크게 실망하여 딸의 나이가 벌써 열 여섯인데 신랑감이 나타나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으냐고 안타까와했다. 조웅은 저녁을 먹고 뜰에 나가 밝은 달을 감상하고 있었다. 이때 안채로부터 꾀꼬리같이 아름답고 고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초산의 나무를 베어 객실을 지은 뜻은 인걸을 보려한 것인데, 영웅은 아니 오고 거지들만 오는구나. 오동나무 베어 거문고를 만든 뜻은 원앙새를 보려 한 것인데 까마귀만 지저귀는구나. 아이야, 술잔에 술 부어라. 술로써 근심이나 풀자꾸나.>

 

  조웅은 자기도 모르게 노랫소리에 취해 정신이 황홀해졌다. 이에 행장을 풀어 퉁소를 꺼내어 화답하니 그 소리가 그지없이 맑았다. 부인과 딸이 내당에서 이 퉁소 소리를 듣고 매우 놀랐다. 이어 우렁찬 노랫소리가 들려오니 그 가사는 이러했다.

 

  <십 년을 공부하여 천문도를 배운 뜻은 달나라의 항아 - 달 속에 있다는 선녀 -를 보렸더니, 은하수에 오작교가 없어 오르기 어렵구나. 푸른 대나무를 베어 퉁소를 만든 뜻은 그리운 님을 보려 한 것인데, 그 누가 이 뜻을 알리오. 아서라, 아는 이 없으니 나그네의 근심이나 위로할까 하노라.>

 

  부인과 딸이 듣고 마음이 황홀하여 중문으로 나와 살며시 엿보니 나그네의 얼굴이 비범하고 풍채가 훌륭한 것이 눈이 번쩍 뜨였다. 부인이 크게 기뻐하여 딸을 보고 말했다. 


  "공자 같은 성인이 나시매 기린이 나고, 아름다운 딸이 나매 영웅이 나는도다." 


  하니, 장낭자가 부끄러워 별당에 들어가 숨었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깜빡 졸았는데 꿈속에 부친이 나와 엄숙히 이르기를, 


  "너의 평생 좋은 짝을 데려왔으니 오늘밤에 아름다운 인연을 맺도록 하라. 집없는 나그네이니 한 번 가면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하시며 빨리 나가라고 성화같이 재촉하는 것이었다. 장낭자가 일어날 때 갑자기 하늘에서 일곱 개의 별을 입에 물은 황룡이 내려와 치마 속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 아닌가. 크게 놀라 깨어보니 일생에 한 번도 보기 힘든 기이한 꿈이었다. 이때 조웅은 자기도 모르게 발길이 옮겨져 중문을 열고 별당까지 이르렀다. 장낭자가 이를 보고 놀라 이불 속에 몸을 숨기니 조웅은 부드럽게 말했다. 


  "낭자께선 놀라지 마십시오. 나는 길가던 나그네인데 시를 읊는 소리가 들리기에 나도 모르게 끌려 들어왔소이다." 


  장낭자가 황망히 대단했다. 


  "남녀 칠세 부동석인데 어찌 예절을 돌보지 않고 아녀자의 방에 들어오십니까? 어서 나가십시오."


  그러나 조웅은 물러가지 않고 자기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낭자께서는 너무 꾸짖지 마십시오. 나도 양반의 후예이니 어찌 예절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지금의 처지가 부모의 승낙을 받을 수가 없으니 나중에 아뢰기로 하고 백년 가약을 정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장낭자는 부끄러움에 고개만 푹 떨구었다. 이에 조웅이 낭자의 손을 이끌고 백년 가약을 맺으니 어찌 천생 배필이 아니겠는가. 은근한 정으로 밤을 지냈는데 날이 샐 무렵에 닭이 울자 조웅이 떠나가려고 했다. 장낭자가 하루만 더 머물러 모친을 뵙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붙잡았으나, 조웅은 자기도 역시 모친을 천 리 밖에 두고 떠난 지 삼 년이나 되기 때문에 하루도 지체할 수 없는 형편임을 알려 주었다. 장낭자는 할 수 없이,


  "그렇다면 무슨 신물이라도 남겨 주소서." 


  하니, 조웅이 옳게 여기며 행장에서 부채를 꺼내 시 한 구절을 지어주면서 이 다음에 만나는 신표로 삼도록 했다. 장낭자가 받아서 읽어보니 다음과 같은 시귀였다. 

 

  <퉁소로 미인의 거문고에 화답하고, 쓸쓸한 방안으로 나를 모르게 들어갔도다. 오늘밤 어린 신랑은 누구인가? 소년 영웅 조웅이 분명 하도다. 새벽바람에 눈물로 하직하니, 길이 아득하여 언제 온다 약속을 못하겠구나.>

 

  조웅이 하직하고 말을 재촉하니 장낭자는 문에 기대어 눈물만 흘렸다. 이 때 장낭자의 어머니 위부인이 한 꿈을 꾸었는데 황룡이 난데없이 나타나 딸을 업고 구름 속으로 올라가므로 발을 구르며 딸을 부르다가 깨어보니 참으로 기이한 꿈이었다. 창문을 여니 날이 밝았으므로 별당으로 나가보니 딸은 아직 자리에 누워 있었다.


  "얘야, 날이 밝았는데 아직도 누워 있느냐?" 


  모친이 말하자 장낭자는 어색한 어조로 물었다.


  "어찌 이렇게 일찍 일어나셨습니까?" 


  위부인이 딸의 모습을 살피다가 근심스럽게 말했다.


  "네 모습을 보니 정신이 없는 듯하구나. 어디가 아프냐?" 


  "아니옵니다. 밤에 달빛을 구경하다가 늦게 잤으므로 조금 피로할 따름이옵니다." 


  이 때 계집종이 와서 바깥채에 머무른 손님이 벌써 떠나갔음을 알렸다. 위부인은 크게 놀라 급히 종들을 풀어 나그네의 종적을 찾았으나 천리마를 타고 날 듯이 간 조웅이 눈에 띌 리가 없었다. 


  "여러 해를 벼른 끝에 훌륭한 신랑감을 만났다가 곧 잃었으니 이런 변이 있나!" 


  위부인이 발을 구르며 애석해 하자 장낭자가 곁에서 위로했다. 


  "어머니는 너무 근심 마옵소서. 세상사는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후일을 기다려 봄이 좋을 듯합니다." 


  한편 -. 왕부인은 아들을 보낸 다음 밤낮으로 근심하며 세월을 보내는데 하루는 월경대사가 와서 위로했다. 


  "부인께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웅이는 어진 스승을 만나고 또 훌륭한 보물을 많이 얻었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왕부인은 의아하여 급히 물었다. 


  "대사께서는 어떻게 아십니까?" 


  "빈승이 어젯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웅이 나타나 말하기를 좋은 스승과 기이한 보검, 그리고 하루에 능히 천 리를 달릴 수 있는 천마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웅이가 이리로 오고 있으니 만나 보시면 모든 것을 아실 것입니다." 


  부인이 크게 기뻐하여 언제 당도할 것인가를 물었다. 월경 대사는 잠시 손을 짚어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지금 밖에 있으니 조금 후면 도착할 것입니다."


  하고 부인을 모셔 절 문밖에 나가 기다렸다. 과연 잠시 후에 불꽃같이 붉은 털을 가진 천리마 위에 한 소년이 타고 나는 듯이 달려오는데 그것이 바로 조웅이었다. 조웅이 말에서 내려 모친게 엎드려 절하니 부인은 아들을 붙들고 흐느껴 울었다. 이윽고 안으로 들어가 조웅이 그 간에 있었던 일을 말하니 모친과 스승은 하늘이 도와주셨다고 크게 기뻐하였다. 다시 모친과 만나 조웅은 그 동안 못다한 효도를 하느라고 세월 가는 줄 몰랐다. 하루는 부인이 아들을 보고 말하기를, 


  "이제 네가 이렇게 컸다만 머나먼 타향에 친척도 없으니 너의 짝을 누가 정해줄 것이냐? 내가 생전에 네 짝을 보지 못할까 걱정이 되는구나." 


  하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이에 조웅이 모친을 위로했다. 


  "어머님께서는 상심하지 마시옵소서. 천지 만물이 모두 짝이 있는데 사람이 설마 짝이 없겠습니까?" 


  하고는, 문득 땅에 엎드려 사죄를 청했다. 


  "어머님, 이 불효 자식을 꾸짖어 주십시오." 


  왕부인이 크게 놀라 물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네가 대체 무슨 죄를 졌다는 것이냐?" 


  "어머님께 불효한 일이 있나이다. 소자가 스승님을 떠나오다가 강호에서 장낭자와 백년 가약을 맺었나이다." 


  하고는 일의 전후를 소상히 아뢰었다. 왕부인이 듣고 크게 기꺼워하였다. 


  "네 말을 들으니 참으로 천생배필이구나. 그것 역시 하늘이 지시한 것이로다." 


  월경대사도 듣고 같이 기뻐했다. 조웅이 며칠 후에 모친께 아뢰었다. 


  "스승님과 기한을 정하고 왔사오니 이제 어머님 곁을 떠나야 할까 합니다." 


  모친이 섭섭한 마음을 억누르고 대답했다. 


  "네 말이 당연하다. 그러나 네 소식이 궁금하면 어디 가서 알아보면 될지 모르겠구나." 


  월경대사가 옆에서 대신 말했다. 


  "부인께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마소서. 웅의 거처는 빈승이 아나이다." 


  부인이 월경대사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어서 떠나라고 도리어 재촉했다. 조웅이 하직하고 여러 날 만에 관산에 이르니 천명도사께서 웃으며 맞이했다. 


  "네가 기약한 날짜를 잊지 않았으니 기특하도다. 어머님께서는 편안하시더냐?" 


  조웅은 엎드려 아뢰었다. 


  "어머님은 편안하시옵니다. 스승님께서도 그 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천명도사는 빙그레 웃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네 거동을 보아하니 분명 배필을 정한 듯하구나." 


  조웅이 땅에 엎드려 사죄했다. 


  "스승님께 큰 죄를 지었나이다." 


  "하하하... 하늘이 정한 것이니 너는 너무 부끄러워하지 말라." 


  천명도사는 조웅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는 그 동안 쉬었던 공부를 다시 계속했다. 조웅의 뛰어난 재질은 육도 삼략과 천문 지리, 그리고 신기한 술법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어 스승은 매우 흐뭇해 했다. 하루는 천명도사가 밝은 달빛에 조웅을 데리고 천문을 살피다가 갑자기 놀란 음성으로 말했다. 


  "웅아, 네 앞길에 큰 근심이 생겼구나." 


  조웅이 놀라 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자세히 가르쳐 주소서." 


  "너의 처가집에 죽음의 변이 닥쳤으니 빨리 가 보아라." 


  천명도사는 엄숙히 말하고는 환약 세 알을 내주었다. 조웅은 약을 받아 가지고 적토마를 몰아 나는 듯이 강호로 달려갔다. 이 때에 장낭자는 조웅을 보내고 소식이 없자 마침내 병이 들어 눕고 말았다. 이에 어머니 위부인이 온갖 약을 써서 치료하였으나 치료되기는커녕 병만 더 위중해졌다. 그러던 차에 조웅이 장진사 댁에 도착하니 슬피우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고 있었다. 조웅이 계집종을 불러 물으니 울면서 대답하기를, 


  "저의 아가씨의 병이 위중하여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니, 조웅이 급히 말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 주인께 아뢰어라. 내게 약이 있으니 병세를 자세히 알려주면 쉽게 고칠 수 있을 것이다." 


  계집종이 안으로 들어가 그대로 여쭈니 위부인은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 때라 부리나케 병세를 적어 보냈다. 그러자 조웅이 잠시 생각하더니 환약을 꺼내 주며 말했다.


"이 환약을 환자에게 먹이고 따뜻한 음식을 먹이도록 하라." 


  과연 시키는대로 환약을 먹이니 장낭자는 언제 병이 들었냐는 듯이 일어났다. 위부인이 크게 기뻐하여 밖으로 나와 조웅의 손을 잡고 사례했다. 


  "공자는 나의 딸을 살려냈으니 우리 집의 은인입니다. 부디 우리 딸을 맞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조웅이 듣고 겸사했다. 


  "떠돌아다니는 몸에게 이렇듯 중한 말씀을 하시니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의 분부가 있어야 하니 돌아가서 소식을 알리겠습니다." 


  하고는, 작별을 고하자 위부인은 부디 소식을 빨리 전해 달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이었다. 조웅이 관산으로 돌아와 스승께 절하며 감사드렸다. 하루는 천명도사가 조웅을 데리고 큰 바위에 올라가 천기를 보더니 크게 놀라며 말했다. 


  "웅이야, 저것이 보이느냐? 별들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으니 천하가 시끄럽게 되었구나. 지금 서쪽 오랑캐가 크게 세력을 떨쳐 대륙을 취하려고 하니 너는 먼저 위나라를 돕고 그 다음에 대송을 회복하라."


  조웅이 엎드려 아뢰었다. 


  "어리석은 제자가 어찌 공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그건 염려 말아. 네 재주면 능히 나라를 구할 수 있도다." 


  스승이 엄숙히 말하니 조웅이는 즉시 행장을 차리고 하직 인사를 올렸다. 


  "스승님, 제자는 다녀오겠습니다." 


  천명도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번 이별은 꽤 오래 걸릴 것이다. 부디 몸을 자중하라." 


  조웅은 스승과 작별하고 나서 즉시 모친에게로 말을 몰았다. 인사를 드리고 나서 장낭자의 병을 고쳐준 일을 여쭈니 모친이 크게 기꺼워하셨다. 조웅이 몸을 바로 하고 모친께 아뢰었다. 


  "지금 서쪽 오랑캐가 세력을 떨쳐 위국을 침범하려고 하니 소자가 비록 재주는 없사오나 나가 막을까 합니다."


  왕부인이 크게 놀라 극구 만류했다. 


  "네가 어린 나이에 어떻게 싸움터에 나가겠다는 거냐? 부질없는 생각은 먹지 말아라." 


  "스승님의 명령인데 소자가 어찌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조웅이 꿋꿋이 말하니 부인이 한숨을 내쉬며 허락했다. 


  "스승님의 말씀이 그러하다면 이 어미도 막을 수가 없구나. 위왕은 네 부친과 전부터 친교가 있는 분으로 이름은 신광이시다. 먼저 위왕을 도와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와서 이 어미를 다시 보도록 하여라." 


  조웅이 모친에게 작별을 하고도 천리마를 몰아 전쟁터로 향했다. 그러나 하루종일 가도 인가가 하나도 없어 하는 수 없이 컴컴한 산길로 들어왔다. 얼마쯤 가다가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리므로 발길을 재촉하니 초가집 두 채가 나타났다. 문을 두드리니 한 늙은이가 나와 맞이했다. 조웅이 사정을 말하고 하룻밤 쉬기를 청하자 노인은 쾌히 응낙했다. 차려준 저녁밥을 먹고 병서를 읽고 있는데 자정이 되어서 문득 선녀같이 아름다운 여자가 살며시 들어와 절을 했다. 


  "너는 어떤 여자이길래 깊은 밤중에 남자의 거처를 찾아오느냐?" 


  그러자 절세 미녀가 맑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저는 이 마을에 사는 여인으로 공자의 행차가 쓸쓸한 것을 보고 위로해 드리고자 왔나이다." 


  조웅이 듣고 틀림없이 귀신이라 여기고 축귀문 - 귀신을 쫓는 주문 -을 외우니 여인이 울면서 방을 나갔다. 이에 조웅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병서에 열중했다.


   이때 갑자기 바람이 크게 일며 돌멩이가 사방으로 나는 것이 천지가 뒤집히는 듯했다. 게다가 문이 저절로 열리고 닫히고 하므로 조웅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앉아 있었다. 한참 후에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키가 구 척에다가 몸에 갑옷을 걸치고 장검을 찬 한 장수가 안으로 들어섰다. 보통 사람이면 한 번 보고 까무라칠 정도로 무시무시한 형상이었으나 조웅은 도리거 두 눈을 부릅뜨고 보검을 빼어 책상을 두드리며 호통쳤다. 


  "너는 어떤 귀신이길래 감히 대장부를 능멸하는가!" 


  그러자 그 장수가 땅에 엎드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닌가. 조웅이 이상하여 음성을 부드럽게 하여 물었다. 


  "깊은 밤중에 이렇게 나타난 것은 깊은 사연이 있는 듯한데 무슨 곡절이오?" 


  장수가 눈물을 거두고 대답했다. 


  "저는 관서땅에서 약간 이름을 날린 장수인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떠도는 신세가 되었으니 어찌 원한이 없겠습니까? 그러다가 오늘 뜻밖에 훌륭한 영웅을 만났으니 제 원수를 갚을 때가 온 듯하여 감히 시험해 보았습니다. 조금 전의 그 여인은 제가 평생 사랑하던 아내입니다."


  하며, 문을 열고 부르자 그 미인이 갑옷과 큰 칼을 들고 들어와 절을 했다. 조웅이 급히 답례하자 그 장수가 말을 이었다. 
  "제 아내가 영웅께 드리는 갑옷과 칼은 부디 성공하시어 저의 원한을 풀어주십사 하는 뜻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승리하시고 돌아오는 길에 갑옷과 칼을 무덤 앞에 묻어 주십시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수와 미인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이튿날 노인을 불러 물으니 한 무덤을 가르쳐 주었다. 마을 뒤로 가보니 두 개의 무덤이 있는데 한 무덤 앞에는 <관서장군 활달의 묘>라는 비석이 서 있고, 그 보다 작은 무덤 앞에는 <관서 장군 월랑의 묘>라고 씌인 비석이 서 있었다. 조웅이 절하고 황금 갑옷과 칼을 가지고 위국으로 떠나니 마치 호랑이에게 날개가 돋친 듯했다.


  며칠 후에 위나라에 당도해서 싸움터로 가서 보니 넓은 벌판에 양쪽이 진을 쳤다. 서쪽 오랑캐 서번국 군사는 산을 등지고 진을 쳤고, 위나라 군사들은 강을 등지고 진을 치고 있었다. 이때 서번은 세력이 강해 용맹한 장수가 구름처럼 많고 군사가 강해 위나라가 맞서 싸우기를 한 달이 되어도 매번 지기만 했다. 이 날도 서로 맞붙어 싸우는데 서번국의 장수가 칼을 번뜩일 때마다 위국 장수는 맥없이 죽거나 도망치기에 바빴다. 번장이 의기양양하여 크게 외쳤다. 


  "위국 장수는 빨리 나와 내 칼을 받으라!" 


  그러자 위국 병사는 얼굴색이 변해 벌벌 떨었다. 위왕이 더 버틸 수가 없어 항복하는 글을 써서 후군장에게 주어 보냈다. 후군장이 번왕에게 나가 항서를 바치니 번왕은 도리어 크게 화를 냈다. 


  "너의 왕이 앉아서 항서만 보내니 어찌 이토록 무례하냐? 우선 네 머리를 베어 본보기로 삼으리라." 


  호통이 채 끝나기도 전에 후군장의 머리가 벌써 말 아래로 굴렀다. 이어 번국 중에서 가장 용맹한 장수가 머리를 칼로 꿰어들고 달려드는 위국 병사는 사시나무 떨듯했다. 


  "마지막이로다!" 


  위왕은 이를 보자 비통히 부르짖으며 스스로 자결하려고 했다. 이때 조웅이 이 모양을 보고 크게 분노하여 갑옷을 입고 보검을 빼어든 채 천리마를 타고 나는 듯이 달려가며 우레같이 호통쳤다. 


  "번장은 빨리 나와 내 칼을 받으라!" 양진의 군사들이 어리둥절하여 보고 있는 사이 조웅은 번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건 또 웬놈이냐?" 


  번장은 우습다는 듯이 칼을 내리쳤다. 그러나 조웅은 머리를 낮추어 쉽게 적의 칼을 피하더니 보검을 번개같이 휘둘렀다. 그러자 부로가 일 합도 겨루지 못하고 번장의 목이 땅위로 굴렀다. 조웅은 적장의 목을 칼 끝에 꿰어들고 나는 듯이 위진으로 돌아왔다. 위왕은 이것이 혹시 꿈이나 아닐까 해서 조웅이 말에서 내려 엎드리는 것도 보지 못했다. 조웅은 엎드린 채 죄를 빌었다. 


  "제가 외인으로 당돌하게 나섰으니 죄를 내리소서." 


  위왕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치하했다.


  "과인이 어리석은 탓으로 장군을 미리 맞아들이지 못했구려. 과인의 목숨이 오늘로 나게 된 것을 장군이 살려 주었으니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겠소. 그런데 장군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오?" 


  조웅은 위왕이 부친과 친함을 아는지라 자기의 내력과 지난 일을 숨김없이 아뢰었다. 그러자 위왕이 크게 놀라며 조웅의 손을 붙들고 말하였다. 


  "장군의 부친은 곧 내 어릴 적의 벗이다. 이제 그대를 보니 어찌 감개무량하지 않으랴." 


  이어 대성의 소식을 물었다. 조웅은 이두병이 송나라를 멸하고 자칭 황제가 되었다는 사실과 자신과 어머니가 역적의 손길을 벗어나려고 망명하여 다니던 일을 자세히 아뢰었다. 위왕이 듣고 송나라 서울을 향해 절하고 슬피 우시니 그 충성이 본래 크고 아름다웠다. 조웅이 같이 눈물을 흘리다가 도리어 위로했다. 


  "대왕께서는 고정하십시오. 아직 오랑캐를 무찌르지 못하였으니 우선 이들을 없앤 후에 앞으로 할 일을 의논하는 것이 좋을 듯 하옵니다."


  한편, 장수를 잃은 번왕은 크게 놀라 주위의 신하들을 돌아보고 물었다. 


  "그 장수는 누구인가? 그 싸우는 모습을 보니 실로 범상한 인물이 아니구나." 


  그러자 한 명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호기 있게 외쳤다. 


  "그 장수의 머리는 저의 칼 끝에 달렸으니 대왕께서는 염려 마옵소서." 


  하고는 곧 장창을 비껴들고 진 앞으로 나와 우레같이 외쳤다. 그러나 몇 합 지나지 않아 조웅의 보검이 한 번 번쩍하더니 번장의 머리가 말 아래로 떨어졌다. 조웅은 기세를 틈타 칼을 휘두르며 외쳤다. 


  "번왕은 빨리 나와 항복하라. 만일 항거하면 머리를 베어 본보기로 삼으리라." 


  번진의 장졸들은 조웅의 무서운 기세에 눌러 멀찍이 물러났다. 조웅이 그대로 쳐들어가려 하자 위왕이 염려하며 북을 쳐서 불렀다. 또 한 명의 장수를 잃자 번왕은 사색이 되었다. 그러자 좌장군 이황이 앞으로 나가 아뢰었다. 


  "대왕께서는 안심하소서. 내일은 소장이 나가 적장을 사로잡겠나이다." 


  이황이 용맹을 뽑내니 번왕은 겨우 마음을 놓았다. 한편 위왕은 조웅으로 대원수를 삼고 대장기를 고쳐 금빛 글자로 <대국충신 위국 대원수>라 크게 쓰게 했다. 이튿날 원수가 대장기를 진 앞에 세우고 천리마에 올라 외쳤다. 


  "번왕은 빨리 나와 항복하라." 


  그러자 적진에서 한 장수가 크게 대답하고 달려 나왔다. 이 때 갑자기 진지에 안개가 자욱하여 사물을 분별할 수가 없었다. 이 틈을 노려 원수 뒤에서 또 한 적장이 달려 들었다. 드디어 세 장수가 얽혀 싸우니 수십 합을 겨루어도 승부를 낼 수가 없었다.


  "받아랏!" 


  이 순간, 대원수 조웅의 칼이 번쩍하더니 한 장수의 목이 떨어졌다. 양편 군사가 놀라 바라보니 바로 번장 이황의 머리였다. 위진에서 이를 보자 기세가 올라 함성이 떠나갈 듯했다. 이어 원수의 맑은 호통소리가 울리며 또 하나의 머리가 떨어지는데 역시 번장의 것이었다. 원수가 크게 위세를 떨쳐 보검을 높이 들고 번진으로 짓쳐들어가 적을 무찌르니 삽시간에 송장이 산같이 쌓이고 서로 밟혀 죽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번진의 장졸들은 견디지 못하고 사방으로 도망쳤다. 번왕 또한 옷을 벗어 팽개치고 도망쳐 버렸다. 원수가 남은 장수들을 묶어 위진으로 돌아오니 위왕이 몸소 진문까지 나아가 원수를 맞이하여 무수히 치하했다. 원수가 땅에 엎드려 사양했다. 


  "모든 것이 다 대왕의 넓으신 덕이옵니다." 


  이어 군사들에게 명해 적의 군량과 무기를 거두어 오도록 했다. 그리고 번장 열 넷을 묶어 들여 준절히 꾸짖었다. 


  "오늘 너희들을 모두 죽일 것이지만 특별히 살려 보내니 너희 왕에게 가서 헛된 생각을 먹지 말라고 하라." 


  하고는 모두 놓아 보내니 패장들은 무한히 감사하며 돌아갔다. 위왕은 크게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어 승전을 축하하고 이번 싸움에 죽은 혼령을 위로했다. 잔치가 끝난 후 원수는 위왕을 모시고 돌아오는데 위엄과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 때 도망쳤던 번왕은 가까스로 군대를 수습하고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위군이 번양 땅에 와서 잠시 쉬니 몰래 따라온 번왕은 군사를 매복하여 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천문 지리에 능통한 원수를 어찌 속아 넘기랴. 원수가 미리 알고 준비하고 있다가 습격해 오는 번왕과 그 장졸들을 깡그리 잡으니 위왕이 더욱 신임했다. 원수가 사로잡힌 번왕을 잡아다가 죽이려 하자 번왕은 땅에 엎드려 애걸했다. 


  "이두병이 대국을 빼앗아 천자가 되었으니 천하가 모두 미워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두병을 없애고 대송을 회복하고자 은근히 노리다가 잘못하여 대왕께 죄를 졌습니다. 대왕과 원수께서 저를 살려 주시면 군사를 일으켜 대송을 회복하는데 힘쓰겠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위왕이 이를 듣고 그럴 듯하여 항서를 받고 엄히 명령했다. 


  "오늘 너를 죽일 것이지마는 특별히 놓아 보낸다. 돌아가서도 위국을 배반하지 말라." 


  이에 번왕은 무수히 절하고 물러갔다. 위왕이 환궁하니 서울의 백성들이 모두 나와 춤을 추며 반겼다. 환궁한지 사흘 만에 큰 잔치를 베풀고 상벌을 고르게 하니 모두들 위랑과 원수의 덕을 칭송했다. 하루는 위왕이 모든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원수에게 말했다. 


  "과인의 나이가 늙어 정신이 차츰 흐려지니 이제 위국의 옥새를 원수에 전하고자 하니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원수가 황공하여 땅에 엎드려 아뢰었다. 


  "소신은 여기에 있을 처지가 못되옵니다. 대송이 역적에게 넘어갔으니 신이 어찌 밤잠을 편히 잘 수가 있겠습니까?" 


  이에 간곡하게 하직 인사를 올렸다. 


  "제가 재주가 없으나 하늘이 도우시고 대왕의 높은 덕으로 다행히 적을 무찔렀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을 객지에 두고 떠났으니 마음이 불안합니다. 이제 송태자의 귀양지로 가서 태자를 모시고 어머니를 뵈오러 떠나겠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위왕이 크게 놀라 함께 떠나겠다고 고집하였다. 이에 원수와 신하들이 일제히 간했다. 


  "어찌 한시라도 나라를 비우시겠다고 하십니까?" 


  위왕은 할 수 없이 탄식을 토했다.


  "아, 내가 원수와 함께 갈 수 없는 형편이로다. 생전에 태자를 뵈오면 저승에 가서도 문제께 군신의 예로 뵈올 낯이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어찌 신하라 하겠는가. 태자께서는 지금 어떻게 지내시는지..." 


  말 끝을 맺지 못하고 비오듯이 눈물을 흘리지 여러 신하들이 위로했다.


  "진정하시옵소서. 언젠가는 대국을 회복할 날이 올 것이옵니다." 


  왕이 가까스로 슬픔을 거두고 원수에게 거듭 부탁을 하였다. 


  "태자를 구하거든 이리 모시고 와 대송을 회복할 의논을 하는 것이 좋으리다. 원수는 부디 내 뜻을 저 버리지 말고 불충의 죄를 면하게 하라." 


  그런 다음 날랜 군사 일천 명과 용맹한 장수 수십 명을 주며 작별을 아쉬워했다. 원수는 위왕과 헤어져 바로 송태자의 귀양지를 향해 행군했다.


  한편, 장진사 댁에서는 조웅의 소식이 없어 밤낮으로 근심하며 지냈다. 이때에 강호자사 - 지금의 도지사 - 가 아내를 잃고 다시 혼인을 하려고 사방으로 수소문하던 중 장낭자의 용모와 덕행이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유모를 보냈다. 유모가 와서 위부인께 말했다. 


  "소문을 듣자하니 귀댁이 낭자가 용모와 행실이 뛰어나게 아름답다 하여 왔으니 만나 보게 해 주십시오." 


  위부인이 듣고 거듭 사양했으나 강호자사의 유모는 막무가내였다. 하는 수 없이 위부인이 딸을 불러 만나게 하니 유모가 그 아름다움에 크게 기뻐하며 돌아갔다.


  유모의 보고를 들은 강호자사는 욕심이 크게 일어 장낭자를 기어코 아내로 맞이하려고 했다. 위부인과 장낭자가 거듭 사절해도 강호자사의 위압적인 권력 앞엔 속수무책이었다. 마침내 강호자사는 혼례날을 자기 마음대로 정하여 준비하라고 통지했다. 위부인과 장낭자는 서로 붙들고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지방을 다스리는 자사의 명을 거역했다가는 그대로 목숨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내일이면 강제로 혼례식을 올리게 되는 날 저녁, 장낭자는 욕을 보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결심하고 자기 방에서 슬피 울고 있었다. 이때에 문득 부친이 돌아가시기 전에 유서를 주시면서 말씀하신 것이 떠올랐다. 

 

  <앞날에 변이 생길테니 그때 가서 뜯어보아라.>

 

  장낭자는 생각이 떠오르자 급히 유서를 꺼내 보았다. 그 글에 적혀 있기를,

 

  <강호자사가 힘으로 너를 핍박할 테니 그때는 서강으로 가거라. 거기 가면 배가 있을 것이로다. 그 배를 타고 남쪽으로 가면 반드시 너를 구해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장낭자는 부친이 이렇듯 앞날을 미리 내다보시는 힘이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 감격의 눈물을 흘리었다. 한시가 급하니 어찌 더 이상 우물쭈물하겠는가. 장낭자는 급히 행장을 꾸며 강호자사의 군사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집을 간신히 빠져 나왔다. 서강에 이르니 과연 배 한 척이 있기에 많은 돈을 주고 사서 남쪽으로 흘러갔다.


  수백 리를 가서 물가에 닿자 배를 내려 산 속으로 들어가니 흰 구름이 산봉우리를 둘러싸고 냇물이 졸졸 흘러 마치 선경 같았다. 차츰 들어가니 목탁 소리가 은근히 들려왔다. 이에 절이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찾아가니 깨끗한 법당이 나타났다. 중들이 낯선 처녀가 홀로 절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물었다. 


  "여시주는 뉘시온데 이렇듯 깊은 산중으로 들어오셨습니까?"


  장낭자는 애처롭게 대답했다. 


  "저는 위국 강호땅에 살았는데 집안에 변이 일어나 의지할 곳없이 떠돌다가 이곳까지 왔나이다." 


  이곳은 바로 조웅의 모친 왕부인이 계신 절이었다. 이에 중들이 장낭자를 왕부인과 월경대사가 계신 곳으로 데려갔다. 왕부인이 보니 세상에서 보기 힘든 미인이라 평범한 사람이 아닌 줄 알고 은근히 물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험한 고생을 겪는구나. 위국땅에 산다고 하니 이번 싸움의 승패를 아는가?" 


  장낭자가 절하며 아뢰었다. 


  "오다가 듣자오니 서번 오랑캐가 크게 패하여 돌아갔다 하옵니다." 


  부인은 이 말을 듣고 조웅이 반드시 살아 돌아오리라 믿고 근심을 덜었다. 이어 장낭자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다가 물었다. 


  "강호에 살았다면 혹시 장진사 댁의 딸을 아는가?" 


  장낭자가 크게 의아하여 도리어 물었다. 


  "어떻게 장처녀를 아십니까?" 


  그러자 왕부인은 아들 조웅이 그간에 겪었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장낭자가 듣고 눈물을 흘리며 행장을 끌러 부채를 내놓았다. 


  "소녀가 공자를 처음 만나자마자 즉시 이별하게 되었는데 그때 공자께서 주고 가신 신물이옵니다."


  왕부인은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여 장낭자의 손을 잡고 말했다. 


  "네가 정말 장처녀라면 나의 며느리이니라." 


  하면서, 부채를 들어 유심히 살피며 감개무량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 부채를 내 아들 웅의 부채가 틀림없구나. 그 아이가 전에 산을 내려가서 장진사 댁의 사위가 되었다고 하면서 네 말을 여러번 했느니라. 내 생전에 너를 보지 못하고 죽을까 염려했더니 하늘이 도우사 오늘 이렇게 만났구나." 


  장낭자도 그대서야 모든 일을 알고 즉시 일어나 두 번 절하며 아뢰었다. 


  "객지에 모친을 모셨다는 말씀은 들었으나 이곳에 계실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왕부인은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나는 팔자가 기박하여 이곳에 와서 머물고 있지만 너는 무슨 까닭으로 여기까지 왔느냐?"


  이에 장낭자는 조웅을 처음 만나던 일과 도중에 병을 고쳐준 일을 여쭈고 도 도망하게 된 사연을 자세히 하니 부인과 여러 중들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이날부터 시어머니와 며느리로서 예를 차려 왕부인을 섬기기를 지성으로 하니 칭송이 자자했다.


  한편 조원수는 태자의 귀양지로 향하면서 각 고을로 미리 연락을 하니 놀라지 않는 곳이 없었다. 들르는 곳마다 자사와 현령들이 줄지어 서서 마중했다. 관서 땅에 이르자 즉시 황 장군의 무덤을 깨끗이 소제하고 제물을 마련하여 친히 제사를 지내니 깃발과 창칼이 줄지어 섰다. 제사가 끝나자 갑옷과 칼을 무덤에 묻으려 하니 돌로 만든 함이 무덤 속에서 솟구쳤다. 원수가 친히 갑옷과 칼을 묻고 승전고를 울리라 명령하자 북과 피리 소리가 요란했다.


  그러자 원수기 아래에 난데없이 신장 하나가 나타나 허리를 굽혀 술 서너 잔을 마셨다. 그리곤 원수를 향해 절을 하더니 홀연히 없어졌다. 이튿날 떠나가면서 원수는 마을 백성들을 불러 단단히 일렀다. 


  "황장군의 무덤을 착실히 가꾸고 봄가을로 제사를 올리라." 


  누구의 명령인데 거역하겠는가. 고을 백성들은 명을 받들 것을 하늘에 두고 맹세했다. 다시 길을 떠나 여러 날 만에 스승이 계신 관산에 이르렀다. 군사들을 산 밑에 쉬게 하고 원수 혼자서 산 중에서 들어가니 주위 풍경은 여전하되 초가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히 여겨 두루 살펴보니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것이 빈 지가 오래였다. 원수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하늘을 우럴 크게 탄식하는데 벽에 전에 보지 못하던 글자가 씌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화산도사는 어느 때 돌아올 것인가. 아침에 금강호요, 저녁에 관산이라. 그림자처럼 가는 곳을 모르니 다시 만날 날이 그 어느 때일꼬.>

 

  조웅은 글귀를 다 보자 스승의 인자한 모습이 더욱 생각나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이윽고 관산에서 내려와 군사들을 거느리고 강호로 떠나면서 장진사 댁에 숙소를 정하리라고 사람을 먼저 보냈다. 이때에 강호자사는 원수의 통지를 받고 매우 놀래어 장진사 댁의 일을 숨기기로 흉계를 꾸몄다. 강호자사의 밀명을 받은 하인이 달려와 원수에게 아뢰었다. 


  "장진사 댁에 살인이 있어 아가씨는 도망하였고 부인은 옥에 갇혔으니 그곳에 머무르기가 불편하실 것이옵니다. 부디 객사에서 쉬시옵소서." 


  원수는 크게 놀라 객사에게 자리잡는 즉시 옥에 갇힌 죄수들을 모두 불러들이라 분부했다. 이에 강호의 온 고을이 술렁이게 되었다. 죄인을 모두 불러들이니 거의 백여 명인데 원수가 하나하나 심문하자 모두들 원통하다는 사람뿐이었다. 그 중에서 왕부인이 쇠약한 몸으로 큰 칼을 쓰고 앉았는데 그 처참한 모습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원수가 가까이 불러 죄목을 물으니 말을 못하고 품속에서 원통한 사연을 적은 글을 꺼내어 올렸다. 원수가 이를 받아 보고 그만 소스라치게 놀랐다. 급히 분부하여 칼을 풀어 위부인을 댁으로 모시라 하고 나머지 죄인들도 모두 석방하도록 했다. 그러자 백여 명의 억울한 죄인들은 허리를 굽혀 사례하고 춤추며 나갔다. 


  "강호자사를 묶어 들여라." 


  원수가 추상같이 호령하니 군사들이 한꺼번에 달려가서 강호자사를 꽁꽁 묶어 대령했다. 이에 원수가 낱낱이 죄목을 들어 꾸짖었다. 


  "네가 국록을 받는 신하로 손가락으로 꼽기 어려울 만큼 죄를 지었으니 살려둘 수 없다." 


  하고 호령하고 병사를 시켜 목을 베게 했다. 이를 본 고을 백성들은 십년 묵은 체증이 가시는 듯 기뻐했다.


  원수가 진사 댁에 들어가니 집이 몹시 거칠어지고 쓸쓸하여 절로 눈물이 났다. 위부인이 나와 감격한 어조로 사의를 표했다. 


  "원수는 누구이시옵니까? 옥석을 가려 주시고 미천한 목숨을 살려주시니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겠습니까?" 


  원수가 절하며 아뢰었다. 


  "부인께서는 오랫동안 옥중에서 고생하시어 저를 몰라 보시는군요. 저는 저번에 부인 댁에 들른 조웅이옵니다." 


  위부인이 그제서야 원수가 조웅임을 알아보고 손을 잡고 통곡했다. 원수가 부인을 위로하며 그간의 사정을 물었다. 그러자 위부인은 약간 진정되어 그간의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하고 딸아이는 혼례식 전날 밤에 집을 나가 어디로 갔는지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고 했다. 원수가 듣고 부인을 좋은 말로 위로했다.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설마 죽기야 하겠습니까? 언젠가는 만나볼 날이 있을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우선 저와 함께 모친이 계신 강선암으로 가십시오." 


  이튿날 원수는 위부인의 식구를 모두 거느리고 강선암으로 떠나는데 미리 통지하기를 <동국충신 위국대원수 겸 각도안찰어사 조웅>이라 했다. 왕부인이 장낭자와 월경대사와 함께 이 통지를 받자 크게 기뻐하여 절 밖으로 나가 기다렸다. 이윽고 한 소년이 황금 갑옷에 보검을 차고 적토마를 타고 들어오는데 그 위엄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뒤에는 수많은 장군들이 질서정연하게 따르고 있었다. 원수가 말에서 내려 모친께 절하며 뵈오니 왕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재회의 기쁨이 약간 진정되자 왕부인이 입을 열었다. 


  "너를 난리 속에 보내고 소식이 없으니 이 어미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어디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보아라." 


  원수가 땅에 엎드려 서번을 무찔러 항복받고 위국을 구한 것과 대원수가 되어 오는 길에 강호에 들러 악덕 관리 강호자사의 목을 베었다는 것을 얘기했다. 그러자 왕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웅이야, 너는 걱정하지 말아라. 장낭자가 이리로 도망하였기에 나와 함께 있었느니라. 또한 오늘 사부인을 모셔 왔으니 이런 기쁨이 또 어디 있겠느냐." 


  하고는, 장낭자더러 나오라고 일렀다. 이윽고 장낭자가 나와 모친을 만나니 서로 붙들고 울며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원수는 두 부인과 장낭자를 별당으로 모시고 밤이 늦도록 얘기를 나누면서 즐기었다. 이튿날 원수는 강선암에게 남은 모친과 위부인, 그리고 장낭자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송태자의 귀양지로 떠났다. 며칠 후에 원수 일행은 태산부 계량도로 가는 도중에 서번국을 지나게 되었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원수께 아뢰었다. 


  "서번국은 우리 위국과는 원수지간이니 근심이 되옵니다." 


  원수가 듣고 크게 꾸짖었다. 


  "장수된 자가 어찌 그리 겁이 많은가? 두렵거든 따라오지 말라." 


  그러자 모든 장수들이 크게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원수가 음성을 부드럽게 하여 위로하였다. 


  "그대들은 너무 근심말라. 번국으로 들어가면 틀림없이 번왕이 나를 유인하리라." 


  이 때 번왕은 원수가 온다는 말을 듣자 모든 장수들을 불러 의논했다. "조웅이 온다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꼬?" 
  한 신하가 앞으로 나와 여쭈었다. 


  "조웅은 욕심이 많고 색을 좋아한다 하니 대접을 잘하고 예쁜 궁녀를 보내어 만호후에 봉한다고 유인하소서." 


  번왕이 옳게 여겨 조웅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조원수가 번국에 이르니 번왕이 사신을 보내어 천금보화를 바치며 반겼다. 원수는 이 선물을 모두 번국의 신하들에게 나누어주니 모두들 크게 기뻐하였다. 번국 성내에 들어가자 진을 치고 군사들에게 휴식하기를 명했다. 이때 번왕이 친히 와서 원수를 뵙고 지난 일을 사죄하니 원수가 좋은 말로 위로했다. 


  "지난 일은 각기 나라를 위함이니 어찌 탓하겠습니까? 다시 만나뵈니 반갑습니다." 


  번왕이 크게 기뻐하여 원수를 유혹했다. 


  "원수는 본래 위국 사람이 아님을 잘 압니다. 지금 우리 번국이 작아도 길이 천 리요, 군사가 백만이며 또한 땅이 기름지고 백성들이 부지런합니다. 원수를 남양후에 봉하려 하니 노여워 마시고 머물러 부귀영화를 누리십시오." 


  원수가 듣고 괘씸하였으나 마음을 너그럽게 먹고 부드럽게 대꾸했다. 


  "저는 지금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이니 대왕의 분부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널리 양해하십시오." 


  이에 한 신하가 나와 예쁜 궁녀를 보내 조원수를 유혹하라고 여쭈었다. 번왕이 이 계책을 받아들여 인물과 노래가 뛰어난 월대라는 궁녀를 원수에게 보내 유혹하게 했다. 그러나 원수가 어떤 인물인데 한낱 오랑캐 궁녀에게 빠질 것인가. 월대가 와서 온갖 교태로 유혹하자 요망하다 하여 한칼에 목을 베었다. 번왕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모든 궁녀들을 모아놓고 조원수를 유혹할 자신이 있는 미녀를 구했다. 그러나 뭇궁녀들이 다 도망하는 가운데 한 궁녀만이 거문고를 안고 자청하여 나섰다. 


  "제가 원수의 마음을 돌이켜 보겠나이다." 


  번왕이 크게 기뻐하여 원수의 진영으로 보냈다. 궁녀가 원수 앞에 나서서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하는데 슬프기가 그지없었다. 궁녀가 문득 거문고를 놓고 눈물을 흘리며 원수께 아뢰기를, 


  "저는 번국 사람이 아니고 위국 서강땅에 사는 두우성의 딸 금년이라 하옵니다. 일직이 아비를 잃고 늙은 어미를 모시고 살다가 저번 난리 때 번국으로 잡혀 왔나이다. 그러다가 하늘이 도우사 원수를 만났으니 바라옵건대 저를 데리고 가셔서 어미의 소식을 알게 해주소서." 


  하고 통곡하며 애걸하니 원수가 심히 불쌍히 여겨 허락했다.


이튿날 원수는 번왕에게 금년을 데리고 가니 양해해 달라고 통지하고 군대를 이끌고 떠났다. 번왕이 듣고 이를 갈며 분해했다. 


  "수많은 재물고 궁녀까지 잃었으니 이 분함을 어찌풀꼬." 


  여러 신하들이 위로하기를 조웅이 다시 이리 올 때에 사로잡아 분을 풀라고 했다.


  한편 원수는 길을 재촉하여 태산부 근처에 이르러 진영을 치고 쉬었다. 이미 고을 사람을 불러 계량도의 소식을 물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이 울면서 말했다. 


  "원수께 아뢰나이다. 지금 태산부의 자사가 송태자를 죽이려고 독약을 가지고 갔사옵니다. 또한 같이 머물러 있는 예전 충신들을 모두 죽인다고 하나이다." 


  원수가 크게 놀라 계량도까지의 거리를 물으니 칠십 리라고 하므로 군사들에게 진영을 치고 엄히 지키라고 분부했다. 그리고 혼자서 적토마에 올라 계량도로 달려갔다. 때마침 밤이 깊었는데 태자가 머무는 곳으로 가니 사방에 창칼이 번뜩이고 군사가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 나는 새라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원수가 안의 형편을 몰래 살피니 늙은 충신들이 가득히 앉은 가운데 한 미인이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옥도끼 금도끼 날을 갈아 월궁의 계수나무를 베는구나. 흔들리는 곳은 어디뇨? 계량도로다. 모시도다, 모시도다, 우리 황태자 모시도다. 눈 속의 매화가지에 봄바람이 불어 꽃이 피었네.모였도다. 모였도다, 송나라 충신들이 모였도다. 묻노라 이 밤이 몇 시더냐? 쓸쓸한 바람은 머리카락을 날리니 늙은 충신 부여잡고 눈물로 하직하니 돌아올 수 없는 것이로고. 바라노니 푸른 산의 매화나무 앞 무덤 아래 묻어 주소서.> 

 

  노래가 끝나자 모든 신하들이 눈물을 비오듯이 흘리며 황태자에게 절하며 물러갔다. 이에 원수가 몸을 솟구쳐 바람같이 들어가 엎드려 네 번 절하고 울며 아뢰었다. 


  "태자께옵서는 귀하신 몸이 안녕하시옵는지요? 소신은 선황제의 충신 조정인의 아들 조웅이옵니다." 


  황태자는 크게 놀라 하문하였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그대가 어찌하여 여기에 왔는가?" 


  그러다가 진짜 조웅임을 알아보시고 눈물을 흘리며 반기셨다. 원수가 좋은 말로 위로했다. 


  "진정하소서. 소신이 왔으니 이제 안심하시오." 


  태자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걱정하셨다. 


  "그대는 어찌하여 죽을 곳에 왔는가? 나는 운이 없어 내일이면 죽을 몸인데 이렇게 만나니 반갑기는커녕 슬프기만 하도다." 


  원수가 위로하며 미녀를 돌아보고 물었다. 


  "이 여인은 누구이옵니까?" 


  "이 고을의 별장이 보내온 계집종으로 나와 함께 슬픔을 함께 하는구나." 


  태자의 대답에 원수가 또 물었다. 


  "이 고을의 별장이란 누구이옵니까?" 


  "백성추라고 하는데 충신이로다. 내가 이곳에 귀양온 후 별장이 잘 대접해 주어 그 은혜를 잊을 수가 없구나." 


  태자는 이어 태산부자사가 내일이면 독약을 먹이고 함께 있는 충신들을 모두 잡아갈 것이라고 하며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원수가 태자와 함께 울다가 은밀히 여쭈었다. 


  "소신이 지금 백 리 밖에 군사를 숨겨 놓고 들어왔으니 안심하소서. 소신이 이제 나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태자님을 모실 것이니 부디 몸을 보증하소서." 


  하고는, 바로 하직하고 나왔다. 단숨에 진영까지 달려온 원수는 즉시 여러 장수를 모아 놓고 분부했다. 


  "그대들은 내가 시키는대로 하라." 


  명령을 내리고 군사를 몰아 계량도로 가니 어느새 날이 어슴푸레해졌다. 원수가 다급하여 칼을 뽑아들고 몸을 날려 태자의 처소로 달려갔다. 이 때 벌써 자사의 부하가 약그릇을 들고 나오는데 충신들은 모두 묶여 있었다. 원수는 이를 보자 분함을 참지 못해 약그릇을 쳐서 깨뜨리고 칼을 들어 자사의 부하를 치니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이어 군사를 재촉하여 모든 충신들을 다 풀어 놓게 하고 태자 앞에 엎드려 절하니 태자가 원수의 손을 잡고 기뻐하였다. 


  "이것이 꿈이 아니길 비는도다." 


  "태자께선 안심하소서." 


  원수가 위로하고 있을 대 증군장 원충이 군사들을 이끌고 풍우같이 들어왔다. 삽시간에 고을을 에워싸고 자사와 그의 부하들을 깡그리 잡아 원수 앞에 끌어오니 모두들 기뻐했다. 원수는 자사 이하 악독한 관리들을 추상같이 꾸짖고 목을 베었다. 이때 태자와 충신들은 기쁨을 이깆 못하여 무수히 치하했다. 


  "장군의 공은 하늘 같도다. 만고에 이런 충신이 또 어디 있겠는가." 


  원수가 사양하고 잔치를 베푸니 백여 명 충신이 모두 일어나 춤을 추면서 즐겼다. 또한 고을 안의 백성들도 모두 춤추며 노래하고 즐기는데 그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였다. 사흘 동안의 잔치가 끝나자 원수가 태자께 아뢰었다. 


  "태산부의 자사와 이웃 고을의 현령들을 모두 없앴으니 따라온 신하 중에서 각기 임명하여 지키게 하십시오." 


  태자가 옳게 여긴 신하를 뽑아 각기 임명하였다. 원수는 일이 끝나자 태자와 여러 충신들을 모시고 길을 떠났다. 위국으로 가려면 부득이 번국을 또 지나야 했다. 이때 번왕은 조웅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잡고자 기다리던 참에 염탐꾼이 알리기를, 


  "조웅이 송태자를 모시고 이리로 오나이다." 


  하므로, 즉시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의논했다. 


  "먼저는 재물과 궁녀만 잃었으니 어찌할꼬?" 


  한 신하가 앞으로 나와 아뢰었다. 


  "조웅이 송태자와 함께 온다 하니 먼저 태자를 유인하여 대궐 안에 가두는 것이 조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조웅에게 우리 번나라와 힘을 합해 대국을 회복하자고 달래면 될 것입니다. 그래도 듣지 않거든 위나라로 가는 길에 마을과 객점을 없애고 다만 만나관과 숙소관만 남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을 따로 쌓아 군사를 숨겨 두어 습격하면 사흘 안에 조웅은 잡힐 것입니다." 


  번왕이 크게 기뻐하여 그 계교대로 하라고 했다. 이 때 원수는 여러 날만에 번국에 이르니 번왕이 십리 밖까지 나와 반기므로 웃으며 말했다. 


  "대왕이 옛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오고 갈 때마다 이렇게 융숭히 대접하니 죄송하나이다." 


  번왕 또한 웃으며 응대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라에 오신 손님을 어찌 박대하겠습니까? 우리 번나라가 비록 가난해도 군사가 강하니 원수를 도와 능히 대국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수께서는 깊이 생각하시어 우리와 합작하도록 하십시오." 


  원수가 좋은 말로 이를 거절했다. 


  "대왕의 뜻은 고맙지만 대국의 남은 충신들이 구름같이 많으니 태자님을 도와 능히 대국을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대왕의 고마우신 뜻은 마음 속에 간직하겠습니다." 


  이에 번왕은 멋적은 표정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원수는 군사들에게 편히 쉬라고 말하고 자신도 막사로 나와 쉬었다. 이 때에 번왕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흉계를 꾸미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에 처음 계획한 대로 태자의 숙소를 군사로 둘러싸고 몰래 잡도록 했다. 태자가 잠을 자다가 주위가 시끄러워 눈을 떠보니 번왕 이하 장수들이 겹겹이 둘러싸 있지를 않은가. 번왕이 반 협박조로 태자에게 말하기를, 


  "내게 딸 하나가 있는데 인물이 뛰어나니 이제 태자께 드리려고 합니다. 거절하시지 마시고 받아 주옵소서." 


  태자가 듣고 크게 꾸짖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국왕이라 하면서 딸아이를 길거리에서 술파는 계집처럼 여기니 한심하도다." 


  이 때 조원수는 잠자리가 뒤숭숭하여 일어나 태자 숙소로 갔다. 가서 보니 번왕이 태자를 능멸하고 있지 않은가. 원수는 크게 분노하여 칼을 빼들고 쳐들어가 지키는 번국의 군사를 마구 죽이니 번왕이 이에 놀라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몇 걸음도 도망가지 못하고 원수에게 사로잡혔다. 


  "벌써 죽일 놈을 이제까지 살려두었더니 안되겠구나!" 


  원수가 당장에 칼을 내리치려 하니 번왕이 땅에 엎드려 애원했다. 


  "부디 한 번만 용서하소서. 다시는 나쁜 마음을 먹지 않겠나이다." 


  그 비는 모습이 너무 처량하여 태자께서는 한 번만 용서하라고 원수에게 권했다. 이에 원수가 번왕의 상투를 잘라 벌하고 밖으로 내쳤다. 그런 다음 군사들을 재촉하여 떠나갔다. 번국의 신하들은 왕이 상투가 잘려진 채 꼴이 말이 아닌 것을 보고 이를 갈며 복수를 맹세했다. 번왕과 신하들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결과 함곡에다가 군사를 매복하여 조웅을 죽이기로 했다. 이윽고 원수가 태자를 모시고 함곡에 도착하니 사방이 온통 절벽인데 오직 좁은 오솔길만이 양의 창자처럼 꼬불꼬불 이어진 것이 천하 제일의 탁한 길이었다. 해는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려고 하니 원수는 마음이 급하여 군사를 재촉해 험곡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 때 문득 동쪽 작은 길에서 누추한 옷을 입은 한 노인이 지팡이를 의지하여 힘겹게 오더니 부채를 들어 원수를 만류했다. 


  "위나라로 가는 조원수를 혹시 보지 못했습니까?" 


  원수가 속으로 크게 놀라 급히 물었다. 


  "제가 바로 조웅인데 무슨 일로 찾으십니까?" 


  그러자 노인이 크게 기뻐하며 대답했다. 


  "나는 천하를 두루 구경하다가 오봉롱에 들어가서 천명도사를 만나 사나흘 묵었습니다. 떠날 때에 편지를 주며 그대에게 전하라 하였으니 받으십시오." 


  원수는 스승이 편지를 보냈다는 말을 듣자 깊이 감사드리고 받았다. 편지를 전한 노인은 두말 않고 오던 길로 돌아갔는데 그 발길이 무척 빨리 삽시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원수가 스승이 계신 곳을 향해 절한 다음 편지를 펼쳐보니 이런 내용이었다. 

 

  <함곡에 들어가지 말고 대포만 한 방 쏘아라.>

 

  원수가 보고 크게 놀라 즉시 좌장군 이홍창을 불러 군사들을 함곡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고 당부했다. 


  "원수께 아뢰오. 선봉은 이미 함곡으로 들어갔나이다." 


  이홍창이 대답하니 원수는 대경하여 엄히 명령을 내렸다. 


  "좌장군은 급히 들어가 선봉을 뒤로 물리라. 그곳에 진을 치는 척하고 한둘씩 빠져 나오면 무사하리라." 


  위홍창이 명령을 받고 급히 들어가 선봉을 무사히 물러나게 했다. 원수는 진을 치고 장졸들에게 명령했다. 


  "그대들은 움직이지 말고 깃발과 무기는 모두 숨기라." 


  그리고 중군장 오원충을 불러 분부했다. 


  "그대는 선봉 군대를 거느리고 함곡 성문 좌우에 숨어 있다가 대포 소리가 울리면 들이치라." 


  하고 다시 유연을 불러 명령했다. 


  "그대는 자정에 몰래 함곡성 안에 들어가 대포 한 방만 쏘고 급히 나오라." 


  이날 밤 자정에 유연이 명령대로 성에 들어가 대포 한 방을 쏘고 물러나오니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는 고함 소리가 울리면서 매복한 번국 군사가 쫓아 나왔다. 그러자 미리 매복하고 있던 중군장 오원충이 달려들어 낱낱이 사로잡았다. 원수 앞에 모두 끌어오니 거의 천여명이 되었다. 원수는 크게 꾸짖기를, 


  "너희들 모두를 죽일 것이로되 특별히 살려 보내니 번왕에게 가서 말하라. 다시 한 번 이런 짓을 하면 내 달려가서 목을 끊겠다고!"


     하고 모두 놓아 보냈다. 그런 다음 명령을 내려 산성을 불사르고 함곡을 지나 위나라 계양에 당도했다.


     그러나 계양 태수가 마중나와 위왕의 편지를 바쳤다. 원수가 부모의 편지를 받은 듯 기뻐하며 뜯어보니 이런 내용이었다. 

 

  <위왕은 원수께 몇 마디 알리노라. 무사히 태자님을 구했는지 근심이 되어 자리에 누으니 그리움이 병이 되었노라. 또한 원수의 근심을 덜기 위하여 모친을 편안히 모시었으니 빨리 돌아와 재회의 기쁨을 맛보기를 바라노라.>

 

  원수는 크게 기뻐하여 사람을 시켜 위왕에게 먼저 통지케 했다. 원수가 길을 재촉하니 자사와 태수들이 줄지어 마중하는데 끊이지를 않았다. 드디어 위국 서울에 무사히 도착하니 위왕이 모든 신하를 거느리고 나와 기다렸다가 태자에 엎드려 네 번 절하고 울면서 아뢰었다. 


  "소왕이 이제야 태자님을 뵈오니 죄가 너무나도 크옵니다." 


  태자가 같이 눈물을 흘리며 위로했다. 


  "내가 살아옴은 모두 위왕의 덕이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는가." 


  위왕이 태자와 원수를 모시고 궁궐로 들어오니 온 백성이 춤을 추며 반겼다. 원수가 시간을 내어 모친과 장모를 뵈오니 다시 만남을 크게 즐거워했다. 이날 밤은 모든 사람들이 나와 태자를 위로하는 잔치를 베푸니 노랫소리가 백 리 밖에까지 들렸다. 이어 수고한 장졸들에게 일일이 상을 내리고 벼슬을 높였다. 이 때 연락병이 와서 알리기를 서번왕이 등창에 걸려 죽고 그의 아들이 즉위하였다 하므로 위왕과 원수가 불행히 여겼다. 원수가 가족과 같이 머물고 있는 사이 경사가 겹쳤다.


  즉, 위왕의 두 딸 중에 장녀는 태자에게 시집을 가고, 차녀는 원수의 첫째 부인 장씨가 극구 추천하여 원고의 둘째 부인이 된 것이다. 또한 번국에서 데려온 금년의 모친을 찾아 모녀가 다시 만나는 기쁨을 나누게 했다. 원수는 한가한 틈을 타서 스승이신 월경대사가 계신 강선암으로 오랜만에 스승을 뵈오러 찾아갔다. 그러나 강선암은 텅텅 비었고 스승 또한 간 곳을 몰라 쓸쓸히 돌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오는 도중에 큰 칼을 허리에 차고 말을 타고 급히 달려오는 사람을 만났다. 원수가 수상이 여기어 물으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계량도에 귀양 간 송태자에게 사약을 내리기 위하여 보낸 사신이 넉 달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으므로 황제께서 알아보라고 하시기에 가는 길이오." 


  하기에, 원수가 크게 노하여 벽력같이 호통쳤다.


  "나는 전조의 충신 조승상의 아들 조웅이다. 역적 이두병을 따르는 무리를 어찌 살려 두겠는가!" 


  호통이 미처 떨어지기 전에 칼이 번뜩하더니 사신의 목이 땅 위로 굴렀다. 원수가 위나라 서울로 다시 돌아오니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대송에 속한 번양 땅 학산이란 곳에 충신들이 군사를 모아 역적 이두병을 칠 준비를 하는데 지휘자는 바로 전 한림학사 왕열이라는 것이었다. 왕열이라면 바로 원수의 모친 왕부인의 사촌이 아닌가. 이에 원수가 때가 왔음을 깨닫고 태자와 위왕 앞에 나아가 엎드려 아뢰었다. 


  "황태자께 삼가 아뢰나이다. 역적 이두병이 대송을 빼앗은지 이미 이십 년이 지났사옵니다. 이제 각처에서 충신 열사들이 역적을 토벌하러 일어서려고 하니 소신은 앞장 서서 나라를 되찾고 역적을 멸하겠사오니 허락해 주시옵소서." 


  태자가 듣고 크게 기뻐하여 즉시 허락했다. 


  "과연 충신의 후예로다. 어서 역적을 쳐서 나라를 되찾으라." 


  태자는 그 즉시 조웅을 대사마 겸 대원수로 봉했다. 위왕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정병 삼만 명을 내주며 격려했다. 원수가 학산으로 나아가 대송의 충신 열사 오천 명과 합세하니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원수가 머리에 은빛 투구를 쓰고 몸에는 금빛 갑옷을 입고 허리에는 활을 차고 천리마에 타니 오른 손에는 보검이 들려 있고 왼손에는 장창이 춤추고 있었다 이것을 본 백성들은 이구동성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원수의 행군하는 법은 천병과 같구나!"


  이윽고 원수가 군사들을 이끌고 번양땅에 이르니 태수로 있는 태원이 군사를 이끌고 나와 길을 막았다. 원수가 보고 우레처럼 호통쳤다. 


  "너는 누구인데 앞길을 막느냐? 나는 대송의 충신 조웅으로 지금 역적 이두병을 치러 가는 중이다." 


  그러자 태원이 크게 놀라 칼을 버리고 말에서 내려와 땅에 엎드려 빌었다. 

 

  "소장이 원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천병에 항거하려 했으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진중에 두시오면 힘을 다해 돕겠나이다." 


  원수가 그 비겁함에 더욱 노해 큰소리로 꾸짖었다. 


  "너는 이두병을 도와 갖은 나쁜 짓을 하고서도 살기를 바라느냐? 정말 음흉한 놈이로다!" 


  호통과 함께 칼을 내리치니 태원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이에 무기와 군량을 거두어 다시 길을 재촉하는데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따르는 자가 헤아릴 수없이 많았다. 행군을 재촉하여 한 곳에 이르니 천여 명의 군사가 진을 치고 있어 원수가 이상하게 여겨 알아본즉 이두병의 친위대였다. 원수가 크게 성을 내어 적토마를 몰아 짓쳐들어가서 칼을 휘두르니 가을 낙엽처럼 적의 머리들이 땅에 떨어졌다. 살아남은 병사 대여섯이 겨우 도망쳐서 이두병에게 가서 아뢰었다. 


  "조웅이 번양태수를 베고 지금 황성으로 쳐들어오는 중입니다. 어서 군사를 내어 막으소서." 


  황제의 지위를 빼앗고 그동안 거드름을 피우던 이두병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이두병이 놀라 어찌할 줄을 몰라할 때 다시 급한 전갈이 왔다. 조웅의 군사 팔십 만이 광음을 함락하고 서주를 침범 중이라는 것이었다. 이두병이 더욱 가무러치도록 놀라 급히 신하들을 모아놓고 대책을 논의하니 좌장군 장덕이 앞으로 썩 나섰다. 


  "신의 재주는 없사오나 조웅을 폐하께 바치겠나이다." 


  이두병이 크게 기뻐하여 대원수의 벼슬을 내리고 많은 군사를 주어 적을 치라 했다.


  한편 조원수는 군사를 이끌고 제양산에 이르러 잠시 쉬고 있었다. 이 때에 골짜기 안에서 한 장수가 군사 수백 명을 이끌고 원수 앞으로 와서 엎드려 아뢰었다. 


  "소장은 전조의 충신 강걸의 아들 강백으로 역시 이두병 때문에 부친을 잃고 여지껏 숨어 있었나이다. 그동안 무예를 연마하고 군사 수백을 길러 떼를 기다리다가 하늘이 도와 원수를 만났으니 진중에 거두어 주옵소서." 


  원수가 듣고 크게 기뻐하여 강백의 손을 잡고 위로했다. 


  "그대가 바로 강백인가? 그대 부인은 계량도에서 태자를 모시고 있다가 지금 위나라에 편히 있으니 안심하라." 


  강백이 뛸 듯이 기뻐하며 원수에게 무수히 절했다. 이에 강백으로 선봉장을 삼아 서주로 쳐들어가니 서주자사 위길대가 삼천의 군사로 길을 막았다. 원수가 선봉장 강백을 불러 명했다 .


  "그대의 재주를 오늘 시험할 것이니 나가 싸우라." 


  강백이 명을 받고 즉시 긴 창을 휘두르며 말을 몰아 위길대에 달려들었다. 위길대도지지 않고 칼을 들어 상대하는데 불과 삼 합만에 강백의 창 끝에 목이 뚫려 죽었다. 그러자 위길대의 아들 위영이 부친의 원수를 갚겠다고 칼을 휘두르며 달려드는데 매우 용맹스러웠다. 그러나 강백의 창술은 신출 귀몰하여 십 합을 겨루다가 한 소리 크게 호통치며 창을 내지르니 왕의 목에서 핏물이 솟구쳤다. 이를 본 원수가 크게 기뻐하여 칭찬을 아끼지 아니했다. 


  "강백의 용맹은 그 옛날 조자룡에 못지 않도다." 


  적진의 군사들은 자사의 부자가 허무하게 죽어 버리자 당할 수 없음을 깨닫고는 산산히 흩어져서 도망쳐 버렸다. 이에 원수가 군대를 몰아 황성 가까이 있는 관산에 도착하니 적군이 벌써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원수가 적진을 살피자 문득 한 장수가 뛰어나와 크게 호령했다. 


  "반적 조웅은 빨리 나와 내 칼을 받으라!" 


  원수가 이를 보고 크게 성이 나 강백을 내보내어 싸우게 했다. 강백이 명을 받고 나는 듯이 달려나가 불과 오합도 되지 않아 적의 머리를 창 끝에 꿰어 돌아왔다. 그러나 이두병으로부터 대원수의 벼슬을 받은 장덕이 앞으로 나와 호통을 쳤다. 


  "반적 조웅은 듣거라. 너는 도망쳤던 죄인으로 아직도 죄를 뉘우치지 않는구나. 내 오늘 너를 잡아 죄를 물으리라." 


  원수가 크게 노하여 마주 호통쳤다. 


  "역적 장덕이 무슨 낯으로 나서느냐? 너같이 더러운 놈이 여지껏 살아 있었다니 우습구나!" 


  호통과 함께 내달아 칼을 풍자처럼 휘둘렀다. 장덕도 용기를 뽐내어 대항했다. 그러나 장덕이 어찌 원수의 무예와 용맹을 당해내겠는가. 삼십 합을 겨우 지탱하다가 팔을 돌려 도망쳤다. 원수가 뒤를 쫓으며 꾸짖었다. 


  "대적은 도망가지 말고 내 칼을 받아라!" 


  이 순간, 도망치는 장덕 앞에 난데없이 황소만한 백호가 나타나 입을 벌려 물려고 했다. 장덕이 크게 놀라 멈칫하는 사이에 뒤쫓아온 원수의 칼이 번뜩하더니 목이 떨어졌다. 이 소식은 지체없이 이두병에게 전해졌다. 믿었던 장수가 허무하게 죽어 버리자 이두병은 간담이 서늘하여 신하들을 돌아보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반적 조웅의 군세가 저토록 강하니 어찌할꼬?" 


  그러자 사마장군 추천이 앞으로 나와 여쭈었다. 


  "장덕은 적을 얕보았다가 패했나이다. 소신이 재주는 없으나 조웅을 잡아 오겠나이다." 


  이두병이 크게 기뻐하며 주천으로 선봉장을 삼고 좌승상 최식에게 대원수의 직책을 내리고 군사 팔십만 명을 거느리게 했다. 한편 조원수는 군사를 몰아 위세 당당하게 들어가니 감히 맞서 싸우는 적군이 없었다. 드디어 관동땅에 이르자 적의 대원수 최식이 팔십만 명의 대병을 거느리고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조원수는 형세를 살핀 다음 초목을 의지하여 진을 쳤다. 이때 적진에서 갑자기 대포소리가 울리면서 적군에서 한 장수가 나와 소리쳤다. 


  "반적 조웅은 발리 항변하라.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리라." 


  선봉장 강백이 듣고 크게 성이 나 즉시 말을 몰아 나가려고 하니 원수가 말했다. 


  "그대는 잠시 분노를 참으라. 내게 좋은 계책이 있느니라." 


  하고는, 군사들에게 명해 적의 도전에 절대로 응하지 말라고 했다. 이 때 적의 대원수 최식은 원수의 진세를 유심히 살피더니 장수들을 모아 분부했다. 


  "조웅이 초목에 의지하여 진을 쳤으니 어찌 병법을 안다 하겠는가? 그대들은 화약을 준비해 가지고 오늘밤 자정에 적지에 나아가 불을 놓아 적을 몰살시켜라. 조웅을 잡는 것은 이제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쉽도다." 


  같은 시각에 조원수는 강백을 불러 은밀히 명을 내렸다. 


  "적장은 우리가 숲에 의지하여 진을 친 것을 보고 반드시 오늘 밤 불을 놓으러 올 것이다. 모든 군사를 은밀히 옮기되 소리를 내지 말라" 


  과연 이날 밤 자정에 최식의 군사가 쳐들어와 사방에 불을 놓았다. 그러자 불빛이 하늘까지 치솟으며 숲을 모두 태웠다. 최식이 이를 보고 크게 기뻐했다. 


  "이제 적은 흔적도 없이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뻐하기도 잠깐, 갑자기 대포소리가 벼락치듯이 울리며 조원수가 칼춤을 추면서 군사들의 목을 무 베듯 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사방에서 조원수의 군사가 벌떼처럼 쏟아져 나와 닥치는대로 베고 찌르니 최식의 군대를 거의 반수나 죽고 부상했다. 놀란 최식은 진문을 굳게 닫고 쥐죽은듯이 엎드려 있었다. 이에 원수가 진문 앞으로 와 크게 호통치기를 


  "역적은 빨리 나와 항복하라!" 


  하니, 뭇군졸들이 겁을 먹고 쥐구멍만 찾았다. 이에 최식이 주천을 보고 말했다. 


  "조웅을 당해낼 장수가 없으니 항복하여 살길을 찾을 수밖에 없구려." 


  주천 또한 싸울 용기를 잃고 있던 터라 찬성했다. 


  "그렇습니다. 빨리 항복하여 살길을 찾는 것만이 현명한 길입니다." 


  최식과 주천은 즉시 항서를 써 가지고 진문을 활짝 열고 나가 원수의 발 밑에 꿇어 엎드려 애걸했다. 


  "소인들이 무지하여 원수의 뜻을 어겼으니 죄는 죽어도 마땅하나 원수께서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목숨만은 살려 주옵소서." 


  원수가 듣고 두 눈을 부릅뜨고 꾸짖었다. 


  "너희들은 천하에 둘도 없는 간신이요, 이두병은 만고의 역적이니 어찌 살려 두겠느냐?" 


  호통과 함께 들어 최식과 주천의 목을 베어 적진 속으로 던지니 적의 군사들이 모두 놀라 도망해 버렸다.


  한편, 이두병은 좋은 소식이 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파발군이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 와서 보고하기를,


  "조웅이 대원수 최식과 주천을 죽이고 팔십 만 대병은 하나도 없이 사라졌나이다." 


  이두병은 너무 놀라운 소식에 넋을 잃고 신하들을 돌아보았다. 


  "가는 군사마다 모조리 패하니 이 일을 어찌할꼬?" 


  한참 근심하고 있는 중에 문득 밖에서 키가 구 척에 가깝고 눈이 왕방울 같은 장수 셋이 들어와 땅에 엎드려 절하는 것이 아닌가. 이두병이 크게 의아하여 어디 사는 누구냐고 묻자 가운데 엎드린 장수가 공손히 아뢰었다. 


  "신들은 동해에서 무예를 연마하고 있던 중 태산부자사로 간 아비가 반적 조웅의 손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나이다. 해서 부친의 원수를 갚으려고 벼르던 중 조웅이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기에 달려 왔나이다. 신들 삼형제의 이름은 일대, 이대, 삼대인데 비록 재주는 없사오나 조웅 따위는 두렵지 않사오니 반적을 치는 데 앞장서게 해주소서." 


  이두병이 듣고 크게 기뻐하여 즉시 군사 오십만을 내주고 일대를 대원수에 봉하고, 이대를 부원수, 삼대를 선봉장을 삼아 간곡히 부탁했다. 


  "그대들은 힘을 다해 조웅을 잡아라. 반적을 잡아 없애면 그 공은 길이 잊지 않겠노라." 


  이에 일대 등 삼형제는 용기 백배하여 군사를 이끌고 곡강에 이르러 백사장에 진을 쳤다. 거기서 며칠 머물러 계책을 의논한 후, 앞으로 진군하여 서창에 도착하니 조원수가 벌써 와서 동창에 진을 치고 기다렸다. 이에 일대는 서창에 진을 치고 이대는 회음에, 삼대는 강진에 진을 쳤다. 이 때 원수의 진에 한 도사가 와서 뵙기를 청하므로 원수가 이상히 여기어 윗자리에 모시고 예의를 다해 대접했다. 그러자 도사는 소매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어 내주며 이르기를, 


  "원수는 과연 하늘이 낸 영웅이로다. 지금 적진을 지휘하는 삼 형제는 내가 가르친 제자들인데 죄악에 빠졌도다. 원수는 이 편지에 적힌 대로 행하라. 나는 세상에 머물러 있을 사람이 아니므로 떠나노라." 


  하더니, 문득 종적이 보이지 않았다. 원수가 크게 의아하여 편지를 펼쳐 보니 아래와 같이 적혀 있었다. 

 

  <일대의 진중에는 들어가지 말지어다. 이대의 진중에는 백마의 피를 칼에 칠하고 귀신을 쫓는 주문을 외우라. 삼대의 진중에서는 결코 삼대 왼쪽에 가까이 하지 말라.>

 

  원수가 보고 마음속 깊이 기억해 두고 도사에게 감사했다. 이튿날 원수는 갑옷을 갖추고 말에 올라 일대의 진 앞으로 나가 크게 외쳤다. 


  "반적은 빨리 나와 내 칼을 받아라." 


  그러나 일대는 진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았다. 이에 원수는 말을 돌려 본진으로 돌아와 강백을 불러 주의를 주었다.
"적장이 문을 열고 나오지 않으니 특히 조심하라." 


  이튿날이 되자 일대가 진문을 열고 나오더니 우레같이 호통쳤다. 


  "반적 조웅은 듣거라, 네가 감히 천하를 시끄럽게 하니 오늘 너를 죽여 공을 세우겠다." 


  원수가 진 앞으로 나가 바라보니 일대는 키가 구 척에 쇠로 만든 갑옷을 입고 수영은 두 자고, 눈이 왕방울 같았다. 원수는 즉시 강백을 불러 일렀다. 


  "그대는 나가 싸우되 적장이 거짓 패하여 도망치거든 절대로 뒤쫓지 말라." 


  강백이 나가 싸우는데 과연 일대는 삼십여 합 겨루다가 거짓 패한 척하고 달아났다. 강백은 원수의 명대로 뒤를 추격하지 않고 본진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원수가 친히 나서서 크게 호령했다. 


  "반적 일대는 어서 나와 나의 칼을 받아라. 감히 나에게 반항 하다니 목숨이 몇 개냐?" 


  일대가 크게 성내어 나와 싸우니 흡사 두 마리의 호랑이가 싸우는 것 같았다. 오십여 합을 겨루다가 일대가 또 거짓 패한 척 도망치니 원수가 조롱을 퍼부었다. 


  "너는 도망치는 공부만 배웠나 보구나."


  하고는, 더 이상 싸우지 않고 본진으로 돌아와 강백에게 계책을 알려주었다. 


  "내일 그대가 적장과 싸우되 날이 저물거든 거짓 패한 척하고 적진으로 들어가라." 


  이튿날 일대가 나와 여러 번 싸움을 걸었으나 원수는 진문을 굳게 닫고 나가지 않다가 저녁 무렵에야 강백에게 나가 싸우라고 했다. 강백이 일대와 싸우기를 오십여 합에 이르니 날이 완전히 저물었다. 이에 강백은 원수가 지시한 계책대로 거짓 패한 척하고 적진으로 달려드니 적의 군사들이 진문을 열어 왼쪽으로 안내했다. 크게 놀란 일대가 강백을 뒤따라 달려드니 일대의 군사들이 적장인 줄 잘못 알고 한꺼번에 달려들어 말을 때렸다. 그러자 일대의 말이 놀라서 함정에 덜어졌다. 군사들이 우루루 몰려들어 창살로 마구 찌르니 일대는 비명을 질렀다. 


  "이놈들아, 너희 대장도 모르느냐?" 


  군사들이 크게 놀라 불을 밝히고 자세히 보니 과연 대장인 일대였다. 이 때 조원수가 군사를 이끌고 풍우같이 덮치니 적의 군사는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원수와 강백이 함정 안을 들여다 보니 일대는 온몸이 창칼에 찔러 비참하게 죽어 있었다. 원수가 보고 탄식했다. 


  "제 꾀에 제가 죽으니 참으로 미련한 놈이로다." 


  이에 적진의 무기와 군량을 거두고 백마를 잡아 칼에 칠하고 이대의 진으로 나아갔다. 이대는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슬피 울며 이를 갈다가 진문을 열어 나와 호통쳤다. 


  "반적 조웅아, 너를 죽여 맏형의 원수를 갚겠다." 


  하고, 나는 듯이 달려들었다. 이에 원수가 맞아 싸울 대 백마의 피를 바른 칼로 치니 이대의 칼이 허공에서 날아 오다가 중도에서 막히곤 했다. 그러나 이대의 용맹은 일대보다 십 배나 강하여 백여 합을 겨루어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에 원수는 도사가 가르쳐 준 대로 귀신을 쫓는 주문을 외우며 평생의 힘을 다하여 이대의 칼을 쳤다. 그러자 이대가 깜짝 놀라며 칼을 떨어뜨렸다. 이 순간, 원수의 칼이 번쩍하더니 이대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대장이 죽자 이대의 군사들은 개미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원수는 이대의 목을 창 끝에서 꿰어들고 승전고를 울리며 삼대의 진에 이르렀다. 


  "서창에서 일대의 목을 베고 회음에서 이대의 머리를 베어 왔다. 삼대야, 어서 나와 칼을 받아라!" 


  원수가 호통치니 삼대가 크게 분노하여 창을 들고 달려 나오며 외쳤다. 


  "너를 죽여 돌아가신 형님의 원수를 갚겠다." 


  원수가 맞이하여 싸우는데 도사가 일러준 대로 삼대의 오른편만 쳤다. 용과 범이 싸우듯 백여 합을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않아 원수는 약간 초조해졌다. 이를 보고 선봉장 강백이 우레같이 호통치며 달려나와 역시 삼대의 오른 편을 노리고 창을 찔렀다. 삼대가 제 아무리 재주가 용한들 두 장수를 당해 내겠는가. 강백의 창이 번뜩하더니 삼대의 말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러자 삼대가 크게 놀라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이를 본 원수가 번개처럼 내달아 삼대의 창든 손을 차니 삼대는 혼비백산하여 창을 버리고 하늘로 날아갔다. 원수도 함께 하늘로 치솟아 칼을 날려 삼대의 목을 쳤다. 그러자 한바탕 거센 바람이 일어나며 삼대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이어 진 앞에 푸른 안개가 자욱이 일어나며 두 줄기 무지개가 공중으로 뻗치는데 삼대의 왼팔 밑에 있던 날개가 날아가는 모습이었다. 삼대의 부하들은 대장이 죽자 역시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원수는 승전고를 높이 울리며 위풍당당하게 황성으로 쳐들어가니 감시 맞설 자가 없었다. 이두병은 믿었던 삼형제가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넋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신하들을 돌아보고 누가 나가서 조웅의 군사와 싸우겠냐고 물어도 나서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이날 밤에 승상 황덕이 조정의 뭇신하들을 모아놓고 은밀히 논하기를, 


  "나라의 멸망이 눈앞에 닥쳤으니 살 길이 없다. 그대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모든 신하들이 두려운 어조로 대답했다. 


  "우리에게 계책이 있을리 있겠습니까? 승상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황덕이 칼을 놓고 계책을 말했다. 


  "모든 죄는 지금 황제로 있는 이두병에게 있다. 우리가 대궐에 들어가 이두병과 아들 오형제를 묶어 조웅에게 바치면 일등 공신이 될 것이니 어떠한가?" 


  모든 신하들이 듣고 찬성했다. 


  "그 게책만이 우리들이 살 길입니다." 


  이에 황덕은 힘센 군사 육십여 명을 거느리고 대궐에 들어가 이두병과 그 아들 오형제를 묶어 수레에 싣고 조원수의 집으로 찾았다. 이 때 황성의 백성들은 조원수가 온다고 하는 말에 크게 기뻐하고 있다가 이두병이 사로잡혀 간다는 말에 모두 나와 구경하는데 그 광경이 구름 떼와 같았다. 이윽고 원수가 팔십만 대병을 몰고 황성으로 들어오니 황성의 남녀노소 모두가 뛰어나와 길에 엎드려 절하며 외쳤다. 


  "장하고 장하구나! 하늘이 조원수를 내서 대송을 회복했구나." 


  원수도 감개무량하여 힘껏 백성들을 위로하며 천천히 나아갔다. 이때 황덕 이하 뭇 신하들이 이두병과 이관 이하 오형제를 수레에 싣고 와 원수 앞에 엎드려 간곡하게 여쭈었다. 


  "소신들이 나라를 버리고 황제를 배신한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대는 이두병의 강압에 못이겨 참여한 것이옵고 날마다 송태자님을 생각하며 세월을 보내다가 천행으로 원수께서 오신다고 하였기에 이렇게 이두병 부자를 잡아 바치옵니다. 원수께서는 부디 소신들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원수가 이두병을 보니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즉시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끌어내어 엎드리게 했다.


  "두병아, 낯을 들어 나를 보아라. 네 죄를 생각하니 죽어도 분이 풀리지 않겠다. 태자를 귀양보내고 독약까지 내리었으니 그 죄가 어떠하며 또 나를 잡으려고 군사를 보내어 세상을 시끄럽게 했으니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원수가 크게 꾸짖으니 백성과 군사들이 달려들어 마구 치고 때린다. 이두병은 견디지 못하여 비명을 지르며 외치기를, 


  "이미 붙잡힌 신세이니 무슨 말을 하리오. 그러나 대송의 옥새를 가로치고 태자를 귀양보내 독약을 내린 것은 모두가 저들 소인배들이 의견을 낸 것이오. 또한 이 지경이 되자 저희들은 죄를 면하고자 꾀를 내어 나를 붙잡아 원수에게 바쳤으니 죄는 모두 저들에게 있지 나는 결백합니다. 원수께서는 밝히 살피십시오." 


  그 말이 너무 간사하므로 원수가 크게 꾸짖었다. 


  "이 간악한 놈아! 너를 잠깐이나마 살려두는 것은 태자님을 기다리는 것이니 그렇게 알라." 


  이어 군사들에게 명하여 이두병과 이관의 형제를 수레에 싣고 대궐로 들어가니 백성들이 춤추며 맞이했다.


  역적을 모두 토벌하자 원수는 충신들에게 황성을 지키도록 하고 위나라로 떠났다. 며칠 만에 태자 앞에 엎드려 절하며 승리한 사연을 여쭈니 태자와 위왕이 크게 기뻐하며 수고를 치하했다. 이어 가족들을 만나 다시 만난 것을 즐긴 다음 이튿날 태자 앞에 나아가 아뢰었다.   


  "황성이 오래 비었으니 어서 환궁하시옵소서." 


  태자가 크게 기뻐하여 허락했다. 


  "즉시 떠날 차비를 차려라." 


  그러자 위왕이 백리 밖에까지 나와 전송하면서 작별을 아쉬워했다. 태자가 환궁하시는데 강백이 군사를 거느리고 앞에 서고 원수가 태자비와 가족들을 모시고 팔십만 명의 대병을 지휘하여 가니 그 위엄은 하늘까지 덮는 듯했다. 여러 날 만에 황성에 도착하니 백성들이 모두 나와 반겼다. 태자가 환궁하여 즉시 성대한 즉위식을 가졌다. 그런 다음 이두병과 그 아들 오형제를 잡아들여 추상같이 꾸짖고 사지를 찢어 죽였다. 백성들은 역적의 시체에 침을 뱉으면서 춤을 추며 즐거워했다. 모든 일이 끝나자 모두 잔치를 열어 싸움에 나갔던 장수들을 일일이 표창하였다 .조원수를 번왕에 봉하고 부인 장씨를 왕비로, 원수의 모친은 정절부인, 장모인 위인은 정부인, 원수의 외숙부 왕열은 우승상, 강백의 부친은 좌승상에 임명하였다. 또한 이번 싸움에 특히 공이 큰 강백에게는 대사마 겸 대원수로 봉하고 나머지 장수들에게도 공을 따라 벼슬을 내리고 군졸들에게도 많은 상금을 내리니 모두들 성은에 감사했다. 마지막으로 이두병을 도운 전조의 신하들을 모두 잡아들여 크게 꾸짖기를, 


  "너희는 간사한 무리로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무리를 내 어찌 살려 두겠느냐?" 


  하시고 능지처참해 버렸다. 이윽고 번왕이 된 조웅이 번국으로 떠나는 날이 되니 황제께서는 눈물을 흘리시며 작별을 아쉬워했다. 


  "짐이 그대의 충성을 생각할 때 번국으로 보낼 수는 없다. 이 천하가 어찌 짐 혼자의 천하인가." 


  번왕이 섬돌 아래 엎드려 공손히 아뢰었다. 


  "황제께서 귀하신 몸으로 만 리 밖에 귀양살이하신 것은 오로지 저희 신하의 잘못이옵니다. 이제 역적으로 무찌르고 다시 나라를 세웠으니, 다시는 간신들이 날뛰지 못하게 미리 방비해야만 할 것입니다. 소왕도 어서 임지로 가서 오랑캐가 준동하지 못하도록 미리 방비하겠나이다." 


  황제가 매우 기뻐하시며 당부했다. 


  "짐이 그대를 만 리 밖으로 보내고 어찌 잠시라도 잊겠는가?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짐을 보러 오도록 하라." 


  번왕이 엎드려 가족들을 이끌고 번국으로 떠났다. 새 황제가 즉위한 후로는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태평세월을 마음껏 즐겼다. 대송 제일 충신 조웅은 번왕이 되어 임지에 귀임하는 즉시 백성들을 따뜻이 보살피어 만민이 태평가를 부르며 찬양했다. 매년 한 번씩 황성으로 올라 그 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즐기니 보는 사람마다 번왕 조웅의 충성을 기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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