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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시] 신석정 -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by 소행성3B17 2016.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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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 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는 인제야 저녁안개가 자욱히 나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맛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욱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뚝을 거쳐서 들려오던 물결소리도 차츰차츰 멀어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을부터 우리 전원(田園)을 방문하는 까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버린 까닭이겠습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습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인제야 저 숲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 1933년 11월 30일 조선일보에 발표된 작품으로 3연으로 짜여진 서정시이다. 부드러운 리듬 속에 명상의 날개를 펴고 전원을 마음껏 만끽하며 사는 목가시인의 만족감이 넘치는 작품이다. 아직 어둡지 않은 황혼, 그 황혼은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황혼, 즉 자연을 촛불을 켜서 손상되게 하지 말라는 것으로, 자연을 한가족같이 사랑하는 시인의 순결한 정신이 깃든 이 작품의 주제는 전원을 만끽하는 만족감이라 하겠다.



  신석정(辛夕汀 1907~1974)

  본명은 석정(錫正). 전북 부안 출생. 중앙 불교 전문강원(專門講院)에서 수학. 광복 후 전주 고교, 전주 상고 등에서 교펀을 잡았고, 영생대(永生大), 전북대 등에 출강했음. '시문학(1930)' 3호부터 동인으로 참가하여 문단에 데뷔. 이후 전원적, 목가적인 많은 시를 발표하여 김동명, 김상용 등과 함께 3대 전원시인 중 제일인자가 됨. 시인 장만영은 그의 동서이며 시조시인 최승범은 사위로 시인 가족이다.

  시집에 '촛불(1939), '슬픈 목가(1947)', '빙하(冰河 1956)', '산의서곡(序曲 1967)', '대바람 소리(197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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