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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시] 바이런 - 우리 둘이 헤어지던 때

by 소행성3B17 2017.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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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둘이 헤어지던 때



  우리 둘이 헤어지던 때

  말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오랜 동안의 이별이기에

  가슴은 찢기는 듯하였다.

  그대 뺨 파랗게 질렸고

  입술을 그 때 그 시각에

  지금의 슬픔은 예고되었다.


  아침 이슬은 싸느다랗게

  내 이마에 흘러 내렸고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깨우쳐 주기라도 했었던가.

  그대의 맹세는 모두 깨어지고

  그대의 명성도 사라졌으니

  사람들이 그대 이름 말하는 때에

  나는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한다.


  내 앞에서 부르는 그대 이름은

  내 귀에 죽음의 종처럼 들리고,

  온 몸에 몸서리를 느끼게 하는데

  왜 그렇게 나는 너를 좋아하였나.

  우리 서로 알았음을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는 그대를 너무나 잘 알았었지.

  길이 길이 나는 너를 슬퍼하리라.

  말하기엔 너무나도 깊은 슬픔을.


  남몰래 만난 우리이기에

  말 못하고 나는 슬퍼한다.

  그대 가슴만이 잊을 수 있었고

  그대의 영혼만이 속일 수 있었지.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난 뒤

  내 만일 그대를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그대에게 인사를 할까?

  말없이 눈물로만 인사를 하나?








  ※ 이 시는 몇 해 전에인가 아무 말 없이 눈물 지으며 연인과 헤어진- 모름지기 어디엔가 나그네길에 나섰던 작자의 재회의 기쁨을 머리에 그리면서 돌아와 보니, 그 연인은 마음이 변하여 명예롭지 못한 소문을 듣는 여자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거기 대한 탄식과 한스러움을 노래한 것으로서, 연애시로서는 진기한 주제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조지 고든 바이런 (George Gordon Byron, 1788~1824)


  셀리, 키츠와 더불어 영국의 3대 낭만파 시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바이런은 격렬한 성격의 소유자로 유명하다.

  나면서부터 절름발이였으나 우아한 얼굴 모습과 뛰어난 시의 재능을 지니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열렬한 사랑을 하였다.

  남부 유럽과 근동을 여행하여 장시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를 써서 혁신적인 정견을 발표하기도 했고, 질투와 일신상의 문제도 생기게 되자, 런던 사교계는 바이런에 대해 차갑게 대했다.

  결국 그는 1816년에 영국을 떠나게 되었고 그 뒤로 두번 다시 고국에는 돌아가지 않았다.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를 전전하면서 창작활동을 계속하여 많은 걸작을 발표하였다.

  바이런은 1823년에 그리스 독립 의용군에 참가하였고, 다음 해에 열병 때문에 미솔롱기에서 다감한 생애를 마쳤다. 의용군은 바이런의 나이와 같은 36발의 예포로 이 시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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