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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시] 퍼시 비시 셸리 - 음악은

by 소행성3B17 2017.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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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악 은



  음악은 부드러운 가락이 끝날 때

  우리의 추억 속에 여운을 남기고

  꽃같은 향기로운 오랑캐꽃 시들 때

  깨우쳐진 느낌 속에 남아 있느니-


  장미꽃 잎사귀는 장미가 죽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의 침상에 쌓이듯,

  이처럼 그대 가고 내 곁에 없는 날

  그대 그린 마음 위에 사랑은 잠든다.







  ※ 멋진 음악은 그것을 듣고 난 뒤 오랜 기억에 남고, 향기로운 꽃은 그것이 시들고 난 뒤에야 그것이 아름다운 꽃이었다고 느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사람 역시 곁에서 사라진 뒤에야 한층 더 그 사람이 그리워지게 마련인 것이다.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 1792~1822)


  퍼시 비시 셸리는 1811년 옥스퍼드 대학 재학 중에 '무신론자의 옹호'라는 팜플렛을 간행하여 퇴학 처분을 당했고, 그 해에 열여섯 살의 소녀 해리에트에웨스트브록과 경솔한 결혼을 했다.

  결국 그 결혼은 살패로 끝나고 말아 해리에트는 자살하고 셀리는 무신론자이며 무정부주의 사상을 지니고 있는 윌리엄 고드윈의 딸 마리와 재혼하게 되었다.

  바이런과 친교를 맺저 함께 스위스에 머물기도 하였고, 이탈리아에 가 살며, 에스테, 베니스, 로마, 피사 등지를 오락가락하며 자유를 누리기도 하였다.

  그는 스페티아 만에 위치한 레리치에 주거를 정하고, 레그혼에 사는 시인 리헌트를 만나러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애용하던 요트 에어리엘 호가 폭풍을 만나 전복하게 되어, 1822년 7월 8일 30세의 나이로 죽었다.

  작품으로는 '알라스터', '지적미의 찬가', '회교도의 반역', '헬라스', 극시 '자유의 몸이 된 프로메테우스', '첸치 일가', '서풍에게', '종달이에게'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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