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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시] 잠 - 나는 당나귀가 좋아

by 소행성3B17 2018.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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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당나귀가 좋아



  물푸레나무 긴 울타리를 끼고 걸어가는

  순한 당나귀가 나는 좋다.


  당나귀는 꿀벌에 마음이 끌려

  두 귀를 쫑긋쫑긋 움직이고


  가난한 사람들을 태워 주기도 하고

  호밀이 가득 든 부대를 나르기도 한다.


  당나귀는 수쳇가에 가까이 이르면

  버거정거리며 주춤걸음으로 걸어간다.


  내 사랑은 당나귈르 바보로 안다.

  어쨌든 당나귀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당나귀는 언제나 생각에 젖어 있고

  그 두 눈은 보드라운 빌로드 빛이다.

   

  마음씨 보드라운 나의 소녀야,

  너는 당나귀만큼 보드랍지 못하다.


  당나귀는 하느님 앞에 있기 때문이다.

  푸른 하늘 닮아서 당나귀는 보드랍다.


  당나귀는 피곤하여 가벼운 모양으로

  외양간에 남아서 쉬고 있다.


  그 가련한 작은 발은

  피곤에 지쳐 있다.


  당나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기가 할 일을 모두 다했다.


  그런데, 내 소녀야, 너는 뭘 했지.

  그런군, 참 바느질을 했지 ······.


  하지만 당나귀는 다쳤단다.

  파리란 놈한테 찔렸단다.


  측은한 생각이 들 만큼

  당나귀는 너무나 일을 많이 한다.


  내 소녀야, 너는 무얼 먹었지?

  ― 너는 앵두를 먹었지?


  당나귀는 호밀조차 먹지 못했다.

  주인이 너무나 가난하기 때문이다.


  당나귀는 고삐를 빨아 먹다가

  그늘에 가 누워 잠이 들었다.


  네 마음의 고삐에는

  그만한 보드라움이 없단다.


  그는 물푸레나무 울타리를 끼고 가는

  아주 순한 당나귀란다.


  내 마음은 괴롭다.

  이런 말을 너는 좋아할 테지.


  그러니 말해 다오, 사랑하는 소녀야,

  나는 울고 있는 걸까, 웃고 있는 걸까?


  가서 늙은 당나귀보고

  이렇게 전해 다오, 나의 마음을.


  내 마음도 당나귀와 마찬가지로

  아침이면 신작로를 걸어간다고.


  당나귀한테 물어라, 나의 소녀야.

  내가 울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를.


  당나귀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당나귀는 어두운 그늘 속을


  착한 마음 한 아름 가득 안고서

  꽃 핀 길을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 잠에게 있어서 자연은 자연인 것이며, 그것을 그대로 노래하는 것이야 말로 자연에 대한 시인의 사랑의 표시한 것이다. 후년에 그가 "시로써 하느님을 찬양한다"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 태도에는 항상 세상과 화해하고 있는 소박스러운 경건감이 있었다. 빛깔과 냄새가 깨끗한 이런 시작 태도에 의하여 잠은 상지주의 말기의 프랑스 시 세계에 새로운 숨을 불어 넣었다. 본시는 그런 잠의 작품 중 대표적인 한 작품이다.











   프랑시스 잠(Francis Jammes, 1868~1938)


  토지 공증인 사무소에서 견습으로 일학 있을 때 최초의 시집을 파리의 친구들, 그가 존경하던 말라르메와 지이드에게 보낸 것이 계기가 되어 그들과 평생의 우정을 맺게 되었다.

  '새벽의 안젤류스에서 저녁의 안젤류스까지', '벚나무 조상의 슬픔' 등의 시집 외에 '클라라 델레븨즈', '산토끼 이야기' 등의 산문 작품을 발표하였다.

  1960년경을 경계로 하여 그의 작품은 종교적인 색채를 짙게 띠게 되었다. '하늘속의 빈터', '그독교의 농경시' 등에는 열렬한 카톨리 시인 클로델에 의한 영향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시든지 산문이든지 간에 잠의 초기 작품에는 태어난 고향의 흙 냄새와 먼 타향에 대한 꿈이 기묘하게 감미로운 우수를 지니고 혼합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서 자연은 자연인 것이며, 그것을 그대로 노래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에 대한 시인의 사랑의 표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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