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

[시] 오상순 - 아시아의 마지막 풍경

by 소행성3B17 2016. 9. 24.
반응형


아시아의 마지막 풍경

- 아시아의 진리는 밤의 진리이다 -




 아시아는 밤이 지배한다. 그리고 밤을 다스린다.

 밤은 아시아의 마음의 상징이요, 아시아는 밤의 실현이다.

 아시아의 밤은 영원의 밤이다. 아시아의 밤의 수태자이다.

 밤은 아시아의 산모요 산파이다.

 아이사는 실로 밤이 낳아 준 선물이다.

 밤은 아시아를 지키는 주인이요 신이다.

 아시아는 어둠의 검이 다스리는 나라요 세계이다.



 아시아의 밤은 한없이 깊고 속모르게 깊다.

 밤은 아시아의 심장이다. 아시아의 심장은 밤에 고동한다.

 아시아는 밤의 호흡 기관이요, 잠은 아시아의 호흡이다.

 잠은 아시아의 눈이다. 아시아는 잠을 통해서 일체상(一切相)을 뚜렷이 본다.

 올빼미 모양으로-



 밤은 아시아의 귀다. 아시아는 잠에 일체음을 듣는다.

 밤은 아시아의 감각이요, 성욕이다.

 아시아는 잠에 만유애(萬有愛)를 느끼고 임을 포옹한다.

 밤은 아시아의 식욕이다. 아시아의 몸은 밤을 먹고 생성한다.

 아시아는 밤에 그 영혼의 양식을 구한다. 맹수 모양으로-

 밤은 아시아의 방순(芳醇)한 술이다. 아시아는 밤에 노래하고 춤춘다.



 아시아의 인식도 예지도 신앙도 모두 밤의 실현이요 표현이다.

 오- 아시아의 마음은 밤의 마음- 아시아의 생리 계통과 정신 체계는 실로 아시아의 밤의 신비적 소사인저-



 밤은 아시아의 미학이요 종교이다.

 밤은 아시아의 유일한 사랑이요 자랑이요 보배요 그 영광이다.

 밤은 아시아의 영혼의 궁전이요 개성의 터요 성격의 틀이다.

 밤은 아시아의 가장 무진장의 보고이다. 마법사의 마술의 보고와도 같은-

 밤은 곧 아시아요, 아시아는 곧 밤이다.

 아시아의 유구한 생명과 개성과 성격과 역사는 밤의 기록이요, 

 밤 신(神)의 발자취요, 밤의 조화요 밤의 생명의 창조적 발전사(發展史)-



 보라! 아시아의 산하 대지와 물상(物相)과 풍물과 품격과 문화-

 유상무상(有相無相)의 일체상(一切相)이 밤의 세례를 받지않는 자 있는가를-

 아시아의 산맥은 아시아의 물의 리듬을 상징하고, 아시아의 물의 리듬은 아시아의 밤의 리듬을 상징하고-

 아시아의 딸들의 칠빛 같은 머리의 흐름은 아시아의 밤의 그윽한 호흡의 리듬-



 한 손으로 지축을 잡아 흔들고, 천지를 함토(含吐)하는 아무리 억세고 사나운 아시아의 사나이라도 그 마음 어느 구석인지 숫처녀의 머리털과도 같이 끝모르게 감돌아 드는 밤 물결의 흐름 같은 리듬의 곡선은 그윽히 서리어 흐르나니-



 그리고, 아시아의 아들들의 자기를 팔아 술과 미(美)와 한숨을 사는 호탕한 방유성(放遊性)등 감당키 어려운 이- 밤 때문이라 하리라.

 밤에 취하고 밤을 사랑하고, 밤을 즐기고 밤을 탄미(嘆美)하고 밤을 숭배하고- 밤에 나서 밤에 살고 밤 속에 죽는 것이 아시아의 운명인가.

 아시아의 침묵과 정밀(靜謐)과 유적(幽寂)과 고담(枯淡)과 전아(典雅)와 곡선과 여운과 현회(玄晦)와 유영(幽影)과 후광(後光)과 또 자미(滋味) 제호미(醍醐味)- 아시아의 밤 심들이 향연의 교향곡의 악보인저. 오- 숭엄학 유현하고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아시아의 밤이여-



 태양은 연소(燃燒)하고 자격(刺激)하고 오만하고 군림하고 명령한다.

 그리고, 남성적이요 부격(父格)이요 적극적이요 공세적이다. 물리적이요 현실적이요 학문적이요 자기 중심적이요 투쟁적이요 물질적이다.

 태양의 아들과 딸은 기승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건설하고 파괴하고 돌진한다.

 백일하에 자신 있게 만유를 분석하고 해부하고 종합하고 통일하고,

 성할 줄만 알고 쇠하는 줄 모르고 기세 좋게 모험학 제작하고 외치고 몸부림치고 피로한다.

 차별상(差別相)에 저회(低廻)하고 유(有)의 면(面)에 고집한다.

 여기 뜻 아닌한 비극의 배태의 탄생이 있다.









※ 12연의 장시 형태로 된 자유시이다. 이 시는 공초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아시아의 오랜 역사와 문화 그 정신을 노래한 충격적인 아시아 선언문이라 할만한 작품이다. 1920년대에 절망과 암흑에 싸인 아시아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 확장 정책 일본 제국주의의 기세 속에서 절망적인 긴 밤의 연속이었다. 이것이 이 시의 배경이다.

 작가는 이 아시아의 절망을 '밤'으로 진단한 데서부터 시작한다. '밤'은 그의 특유의 관념적 허무 사상에 점화되어 격렬한 탄주에 이르고, 그것은 아시아의 정신을 설파한 것이다. 주제는 아시아의 본질과 정신 도는 잠의 예찬과 인가애이다.







오상순(吳相淳 1894 ~ 1963)

 호는 공초(空超). 서울 출생, 경신 학교를 거쳐, 19세 때 도일하여 도시샤(同志社)대학 종교 철학과 졸업. 1920년 '폐허' 동인이 되고, 조선 중앙불교학림 보원, 보성고보 영어 교사를 거쳐 동래 범어사(梵魚寺)에 입산, 이후 독신, 방랑, 참선, 애연(愛煙) 생활로 일관했음. 대한민국 예술원상(1956), 서울시 문화상(1962) 등을 각각 수상함. '방랑의 마음(1923)', '허무혼의 선언(1923)', '폐허행(1924)', '한잔술(1949)', 에세이에 '시대고와 희생(1920)' 등이 있으며, 시집은 작고한 뒤 발간된 '공초 오상순 시집(1963)'이 있다.


반응형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 오상순 - 한 잔 술  (0) 2016.09.26
[시] 오상순 - 방랑의 마음  (0) 2016.09.26
[시] 최남선 - 봄 길  (0) 2016.09.23
[시] 최남선 - 3.1절  (0) 2016.09.23
[시] 최남선 - 해에게서 소년에게  (0) 2016.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