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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소설] 박지원 - 허생전

by 소행성3B17 2017.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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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읽기를 그만두다.


  옛날, 서울 남산 밑 묵적골에 허생이라는 선비가 살았다.

  묵적골은 예로부터 선비들만 살아서 선비 마을로 알려진 동네다.

  산 밑 골짜기로 곧장 올라가면 커다란 우물이 하나 있고, 거기서 더 올라가면 오래 된 은행나무가 한 그루 우뚝 서 있다.

  허생의 집 사립문은 은행나무를 마주 보고 언제나 활짝 열려 있었다.

  집이라고 해야 조그만 초가 삼간으로 비바람을 견디다 못해 거의 다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였다.

  그러나 허생은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붕이 썩어서, 방 안에 빗물이 새는 날이면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가락삼아 들으며 글을 읽었다.

  이 곳 남산 밑 묵적골 선비들은 하루 종일 방 안에만 틀어박혀 글만 읽었다. 그 밖에 하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허생 또한 밤낮으로 책상 앞을 떠날 줄 몰랐다. 오직 글읽기만을 즐겨했던 허생은 배가 고픈 것도 세상일도 모두 잊은 채 마음편히 지냈다.

  허생이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자 아내가 삯바느질을 해서 그날 그날 겨우 입에 풀칠을 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 일이란 어려움이 많은 법이다. 남의 바느질 품을 파는 것조차도 일감이 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감이 떨어질 때에는 끼니를 굶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끼니 건너뛰기를 먹기보다 자주 하였다.

  그런데도 허생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책만 읽었다.

  허생의 아내는 마음씨가 착했다.

  글만 읽는 허생에게 불평 한 마디, 듣기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그러나 참는 것도 분수가 있는 법. 하루는 허생의 아내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훌쩍훌쩍 울며

  "당신은 한평생 과거도 보지 않으시면서 읽어서 무엇하시렵니까?" 하고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허생은

  "내 아직 글읽기가 서툴러서 그런가 보오."

  하고 껄껄 웃어 넘겼다.

  아내가 다시

  "밤낮없이 글을 읽으시고도 과거를 못 치르시겠다면 목수나 대장장이 같은 막일이라도 하실 일이지 왜 이러고 계십니까?" 하자, 허생은 겸연쩍어하면서

  "막일은 배우지 못했으니,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겠소?" 하였다.

  아내가 다시

  "그럼, 하다못해 장사라도 하셔야지요." 했다.

  허생은 낯이 화끈했다. 하지만

  "장사를 하려 해도 밑천이 없으니 어떡하오." 하고 태연스럽게 대꾸했다.

  마침내 허생의 아내는 뾰로통했다.

  "당신은 밤낮으로 글을 읽더니만 겨우 '어떡하오' 하는 것만 배우셨군요. 그래, 목수나 대장장이 노릇도 못 한다, 장사도 못 한다 하시면 돈 안 드는 도둑질이라도 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하고, 매우 화난 말투로 대들었다.

  허생은 책장을 탁 덮고는 벌떡 일어섰다.

  그러더니 혼잣말로

  "참, 안타까운 일이로다. 내 애초에 글읽기를 시작할 때부터 십 년을 한하고 그걸 채우려 했는데, 이제 칠 년밖에 되지 않았거늘." 하고는, 두루마기를 떼어 입고 갓을 쓰고 나갈 채비를 하였다.

  가세가 매우 어려운 처지라 갓은 찌그러지고 두루마기는 낡아 하릴없는 비렁뱅이 모습이었다.

  칠 년 만에 바깥 나들이를 해 보니 장안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다.

  크고 좋은 집들이 곳곳마다 들어서고 새로운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옛 모습이 아닌 데에 허생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길도 새로 뚫리어 어리벙벙해서 어디가 어딘지 몰라 한참을 헤매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허생은 이 골목 저 골목을 가까스로 돌아 나와 종로에 이르렀다.

  종로 거리는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허생은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며 종로 거리를 오르락내리락하다가 생판 모르는 길가는 사람 하나를 붙잡고 다짜고짜 물었다.

  "여보시오. 한양에서 으뜸가는 부자가 누구요?"

  그 사람은 얼떨떨해 가지고 장안에서 첫째가는 부자라면 아무래도 '변씨' 라고 일러 주었다.

  "변씨요? 그래, 그 변씨 집이 어디요?"

  그랬더니 길가던 사람은 차근차근 자세히 일러 주었다.

  허생은 그 길로 변씨 집으로 향했다. 

  



  장안의 으뜸 부자


  길을 물어 물어 찾아 낸 변씨의 집은 장안에서 으뜸가는 부잣집답게 솟을대문부터 으리으리했다.

  보아하니, 큰 곳간들이 여러 채 있었고, 넓은 마당에는 쌓아 놓은 곡식더미가 여기저기 있었다.

  일하는 하인들도 수십 명이나 되는 듯했다. 많은 하인들이 저마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허생은 변씨의 집 대문 앞에서 큰기침을 하며

  "어험, 이리 오너라!" 하고 점잖게 하인을 불렀다.

  일하던 하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으나 허생의 모습이 너무 초라해서인지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허생은 이내 눈치를 챘다. 더 큰 소리로 헛기침을 하고나서

  "에끼, 이놈들! 괘씸하구나. 감히 뉘 앞이라고 이리도 박대하느냐? 손님이 오셨는데 냉큼 너희 주인앞으로 모시지 못할까!" 하고 호령했다.

  허생의 말은 매우 위엄이 있었다.

  변씨 집 하인들은 그만 기가 꺾여 쩔쩔매었다.

  하인들은 태도를 바꾸어 공손하게

  "예, 예, 죄송합니다요, 나리. 저희주인 어른께 뭐라고 여쭐까요? 어디서 오신 뉘신지요?"

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허생은 또 헛기침을 하고 나서

  "그냥 어떤 이가 돈을 좀 빌리러 왔다고만 여쭈어라. 어디서 찾아온 누구라는 건 알릴 것 없느니라." 하고 점잖게 일렀다.

  하인은 속으로 '별사람 다 보겠네' 하면서

  "하지만 나리, 주인 어른께서는 누구시라 분명히 말씀드려야 손님을 만나실 텐테요." 했다.

  허생은 이 말에 발끈 화를 내며 큰소리로

  "어허, 버릇없는 놈들이로고. 손님이 말씀하면 그대로 따를 일이지, 어찌 그리 잔말이 많으냐!" 하고 또 호통을 쳤다.

  하인은 호통 소리에 놀라 움찔하며

  "그럼 이르신 대로 주인 어른께 전해 드리겠습니다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하고는 사랑채로 달려갔다.

  "주인나리, 구지레한 어떤 사람이 돈을 빌리러 왔다면서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고 하인이 변씨에게 아뢰었다.

  "어디 사는 누구라고 하더냐?"

  주인 변씨가 물었다.

  "자세히 물어 보았지만 대답은 하지 않고 큰 소리로 야단만 칩니다요. 차림새는 초라하지만 위엄을 갖춘 별스런 사람 같습니다요."

  하인의 말을 듣고, 변씨는 참 별난 사람도 다 있구나 싶었다. 그래서

  "어쨌든 이리로 모셔라." 하고 하인에게 일렀다.

  잠시 뒤, 허생이 변씨의 사랑방으로 성큼 들어섰다.

  허생은 변씨 앞에 두 손을 마주 잡고 허리를 굽힌 다음

  "내가 무엇을 좀 해보려고 하나 집이 가난하여 밑천이 없소그려. 그러니, 돈 만냥만 빌려 주시오."하고 청하였다.

  '아니, 만 냥씩이나!'

  변씨는 이 말을 듣고 마음 속으로 놀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담이 큰 허생의 사람됨에 끌렸다.

  비록 차림새는 볼품이 없지만, 별처럼 초롱초롱한 눈빛하며 위엄 있는 말투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분명 보통 사람은 아닌 듯 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변씨는

  "좋소, 그렇게 하리다."

  하고 선뜻 승낙하고는 그 자리에서 돈 만 냥을 허생에게 내주었다.

  그러자 허생은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물러가는 것이었다.

  변씨의 집에는 그의 아들들과 손님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들이 문 밖으로 나가는 허생의 모습을 보아하니 비렁뱅이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제딴에는 선비라고 실띠를 허리에 둘러매기를 했으나 술은 다 빠지고 없었으며, 가죽신이라고 발에 꿰기는 했으나 이것 또한 뒤꿈치가 다 닳아빠져 신으나마나 한 것이었다.

  찌그러지고 망가진 갓에다가 땟국이 줄줄 흐르고 군데군데 기워진 두루마기하며 말간 콧물까지 훌쩍훌쩍 하는 모습이 비렁뱅이 중에서도 으뜸가는 비렁뱅이였다.

  허생이 돌아간 뒤에 모두들 궁금해하며

  "어르신, 그 손님 혹 잘 아시는 분이십니까?" 하고 물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야."

  변씨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했다.

  사람들은 크게 놀라서

  "그러시다면 어찌하여 그렇게 큰돈을 꾸어 주셨습니까? 꾸어 주신 게 아니라 거저 주신 게 아닙니까? 더군다나 그가 사는 데는커녕 그의 이름 석 자도 묻지 않으시다니,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변씨는

  "너희들이 알 바가 아니다. 대체로 남에게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은 자기의 속마음을 숨기고 그럴 듯 하게 말을 꾸며서 언제까지 갚겠다고 하느니라. 으레 이 말 저 말 길게 늘여놓는데 그 사람은 다짜고짜 꿔달라더구나. 언제까지 갚겠다는

말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떳떳한 게야. 그 손님은 옷이며 신발이 비록 다 해지고 닳아, 그 모습이 초라하긴 했지만 우선 말이 간단하고 분명하더군. 사람을 대하는 눈가짐도 아랫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하고. 그러고도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빛이 없었다. 그것으로 보아 그는 분명 재산 모으는 일에는 별로 생각이 없고, 벌써 오래 전부터 스스로의 살림에 만족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보기 드물게 별스럽고 이상한 사람인 듯했으나, 지난 뜻이 꽤 큰 것 같았다. 모르는 나를 찾아와, 처음 보는 자리에서 그렇게 많은 돈을 빌려 달라고 하는 것만 보더라도 아주 배짱이 두둑한 사람이야. 그만한 용기를 지닌 사람이라면, 무슨 일을 해도 꼭 이루리라고 생각되더군. 그러니, 모르긴 해도 아마 그가 한 번 해 보려고 하는 일이라는 것도 작은 일은 아닐게야. 나 또한 그 사람을 한 번 시험해 보려는 뜻도 있고."

하고 차근차근 일러 주었다.

  아들들은

  "아무리 그리하더라도 이름은 알아 두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하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변씨는

  "돈을 건네 주지 않았으면 모르려니와, 이미 만 냥을 내주었는데, 굳이 그의 이름 석 자는 물어서 무얼 하겠느냐." 하고 타일렀다.

  "과연 장안에서 제일 가는 부자답게 통이 큰 어르신이십니다!"

  사람들은 감탄했다.

  한편, 만 냥을 쉽사리 얻은 허생은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고 곰곰 생각했다.

  '저 안성 땅은 경기와 충청의 갈림길이지. 또한 삼남으로 내려가는 중요한 길목이라, 나라 안의 갖가지 산물들이 모이는 곳이다.'

  삼남이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허생은 곧 안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과일 장사로 십만 냥을


  허생은 안성 장터를 한 바퀴 돌아보고는 그 근처에 거처할 만한 집을 정해 놓았다.

  또 같이 일할 일꾼도 후한 삯을 주기로 하고 십여명 구했다.

  허생은 이튿날부터 시장에 나가서 대추, 밤, 감, 배, 감자, 석류, 귤, 유자 따위 과일을 모조리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또 놀고 있는 빈 땅을 여기저기 사서 넓은 곳간을 군데군데 지어 놓았다.

  갖가지 과실을 사는 대로 허생은 그것을 곳간에 차곡차곡 잘 쌓아 놓았다.

  당장 안성 과일이 동이 났다.

  과일값은 하루가 다르게 뛰어올랐다.

  이렇게 해서 얼마 안 가, 나라 안의 과일이란 과일은 동이 나고 말았다.

  집집마다 잔치나 제사를 지내려고 해도 과일이 없어서, 상차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나라 안이 과일 때문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

  허생이 과일을 깡그리 긁어모았다는 소문을 들은 과일 장수들이 허생에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과일 장수들은 허생에게 과일을 팔아 달라고 간곡히 애원했다.

  그러나 허생은 곳간 문에다 빗장을 지른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값은 달라시는 대로 드릴 테니, 제발 과일을 팔아 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과일값은 부르는 게 값이 되었다.

  '이제부터 슬슬 장사를 시작해 볼까.'

  허생은 그제야 마음이 움직였다.

  허생은 곳간에 쌓아 둔 과일들을 조금씩 조금씩 내놓았다.

  산 값의 열 곱보다도 더 많이 받았다.

  그래도 과일 징수들은 서로 다투어 그 비싼 과일을 사 갔다.

  과일을 다 팔고 나니 십만 냥이란 엄청난 돈이 생겼다. 그로서는 그렇게 많은 돈을 구경하는 것조차 처음이었다.

  그러나 허생은 여기에서 머무를 수는 없었다. 아직도 할 일은 많다고  생각했다.

  과일 장사를 해서 제일 처음 뜻한 바를 이루었지만 하고 싶은 일이 또 있었다.

  허생은

  "어허, 겨우 만 냥으로 온 나라 안의 살림을 기울이게 할 수 있다니, 이 나라의 얕고 깊음을 알 만하구나!" 하면서 걱정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허생은 십만 냥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더 큰돈을 벌 수 있을까 하고 곰곰히 생각했다.

      





  말총 장사


  며칠이 지났다.

  허생은 느닷없이 칼, 호미, 베, 명주, 솜 따위를 사들이기 시작하더니 그것을 챙겨 가지고는 제주도로 건너갔다.

  농사짓는 기구와 옷감이 부족한 제주도에서는 허생이 가지고 간 물건들이 매우 필요한 것들이었다.

  물건은 며칠 새에 다 팔려 나갔다.

  제주도에서도 수만 냥의 이익을 볼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제주도의 특산물인 말총을 모조리 사들이기 시작했다. 말총이란 말의  갈기나 꼬리털을 말한다.

  허생은 사람들을 써서 값을 깎지 않고 부르는 대로 주고 말총을 사들였다.

  허생은 여기서도 곳곳에 곳간을 마련해 두었다.

  그러자 얼마 안 가서 나라 안 가서 나라 안에 말총이 동이 났다.

  제주도의 말총은 모조리 허생의 곳간에 쌓여 있었던 것이다.

  말총은 갓이나 망건 따위를 만드는 데에 쓰인다. 따라서 말총이 없으면 갓이나 망건을 만들 수가 없다.

  갓이나 망건은, 예의를 갖추는 양반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말총을 사들인 허생은 혼잣말로

  "몇 해만 있으면 온 나라 사람들이 상투도 틀지 못하게 될걸." 했다.

  말총값이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다.

  갓 장수, 망건 장수들은 갖고 있던 것들을 비싼 값에 팔았지만 말총을 다시 사들일 수가 없었다.

  과연 허생의 생각대로 되었다.

  이젠 웬만한 돈을 주고도 말총을 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새것을 좋아하는 양반들과 벼슬아치들이지만, 할 수 없이 헌 갓과 망건을 꿰매어 쓰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제주도에 있는 허생이 말총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자 갓, 망건 장수들은 앞을 다투어 제주도로 모여들었다.

  모두들 몸이 달아 말총을 팔라고 아우성이었다. 하지만 허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장사치들은 값을 높여 부르며 흥정하였다.

  마침내 허생이 사 모은 말총은 열 곱 이상의 비싼값으로 팔리게 되었다.

  허생은 백만 냥을 손쉽게 손에 쥐었다.

  이렇듯 많은 돈을 벌었는데도 허생은 제 몸을 위해서는 단 한푼도 쓰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초라한 모습 그대로 였다.

  허생은 먹고 입는 것에 조금도 마음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백만 냥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손에 쥔 허생은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무언가 뜻있는 일을 한번 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허생의 머릿속에서 생각의 실타래는 끊임없이 풀려 나가고 있었다.

  '뜻있고 좋은 일이 무엇일까?'

  허생은 골똘히 생각했다. 밤에도 자지 않고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다가 날을 밝혔다. 

    





  아무도 살지 않는 섬을 찾아서


  어느 날 허생은 나루터에 나가 늙은 뱃사공 한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여보게, 혹시 바다 밖에 사람이 살 만한 빈 섬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사공은 눈을 끔벅이며 한참 생각하더니

  "예, 예, 있습지요. 제가 언젠가 바람에 휩쓸려 줄곧 서쪽으로 사흘 밤낮을 떠내려갔었습죠. 그러다가 어느 한 섬에 닿았습지요. 그 곳은 아마 사문과 장기 사이에 있는 작은 섬인 듯합니다요. 그 섬은 수풀이 우거진 가운데 온갖 꽃과 풀들이 저절로 피어나고, 과일과 오이가 절로 나서 자라고 여물어 떨어지고 있습니다요. 어디 그뿐입니까요? 고라니와 사슴이 떼지어 다니고, 헤엄쳐 노는 물고기조차도 사람을 보고도 놀라지 않더군입쇼. 참으로 조용하고 아름다운 섬입니다요." 하고 알려 주었다.

  사공의 말을 들은 허생은 기쁨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뜻한 대로 일이 잘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허생은 그 뱃사공을 조용히 불러

  "아까 얘기한 그 섬을 찾을 수 있겠나?" 하고 물었다.

  뱃사공은 이내

  "예, 여기서 동남쪽으로 배를 곧장 저어 가면 그 섬에 닿을 겁니다요." 하고 대답했다. 허생은

  "거참, 자네를 잘 만났네. 나를 그 섬으로 데려다 주게나. 그렇게만 해 준다면 오래도록 길이길이 넉넉함을 누리도록 해 주겠네." 하고 청하였다.

  "좋습니다요!"

  사공은 허생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드디어 허생과 사공은 그 섬을 찾아 나서기로 하였다.

  바람이 알맞게 부는 날을 기다려, 끝없이 너른 바다를 향해 돛을 올렸다.

  허생은 가슴이 설레었다.

  그 섬은 과연 어떤 곳일까? 사공이 말한 대로 아름다운 곳일까? 갖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나갔다.

  바람이 때마침 배가 나아가는 방향으로 솔솔 불었다. 그리하여 생각보다 빨리 목적지에 다가갈 수 있었다.

  육지를 떠난 지 며칠이 흘렀다.

  푸른 섬이 눈앞에 아른아른 보였다.

  "저깁니다요. 바로 저 섬입니다요!"

  사공은 소리 높여 말했다.

  "그래, 저 섬이 틀림없나?"

  허생은 반가워 다시 물었다.

  "틀림없습니다요!"

  사공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잠시 뒤 배가 섬에 닿았다.

  배에서 내린 허생은 곧장 제일 높은 산꼭대기로 올라가서는 사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과연 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섬이었다.

  허생은 저 멀리까지 내다보았다. 그러더니

  "땅이 천리가 채 못 되는 좁은 곳이니 무엇을 하겠느냐. 그러나 땅이 기름지고 수풀이 우거진 데다가 물맛 또한 기막히게 좋구나! 이 곳에서 산다면 부잣집 늙은이 노릇쯤은 할 수 있겠다." 하고는 아쉬워했다.

  옆에서 이 소리를 들은 사공은

  "아니, 사람 하나 구경할 수 없는 텅 빈 이 섬에서 누구와 더불어 살아 부자가 된단 말씀입니까요?" 하고 물었다.

  허생은 껄껄 웃었다.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저절로 찾아드는 법일세. 덕이 없는 것이 근심이지, 내 어찌 사람 없는 것을 걱정하겠는가?"

  허생의 말에 사공은 더욱더 궁금히 여기어,

  "이 섬은 비록 살기 좋은 곳이라 해도 뭍과 많이 떨어져 있어 너무 외집니다요. 그러하니 사람이 와서 살기도 쉽지 않겠는뎁쇼."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허생은

  "좋은 방법이 있을 걸세. 곰곰 생각해 보세나." 하면서 뱃사공과 함께 섬 안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비록 좁은 땅이긴 하나 기름지고 아름다운 이 섬, 이 곳에 살 백성들을 맞아들여야 한다. 나라에 도움이 되고 어려운 사람도 구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없을까? 아! 있다. 그래, 그렇게 하자. 나라 안 곳곳에 흩어져 있는 뭇 도적들을 잘 달래서 이 곳으로 데리고 오자. 먹을 것, 입을 것이 해결된다면 그들도 본시 악한 사람들은 아니리라.'

  허생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무렵 변산 지방에 수천 명의 도적이 떼를 지어 나타났다. 도적들은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구석구석까지 몽땅 털어 갔다.

  백성들은 두려워서 벌벌 떨었다.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나라에서도 큰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여러 고을에서는 도적을 잡기 위해 군사를 풀었으나 도적들은 쉽게 잡히질 않았다. 

    





  도적의 무리를 찾아가다.


  허생은 이 소문을 듣고 돈을 가득 실은 여러 척의 배를 변산 바닷가에 머무르게 하였다.

  그리고 변산 지방에 있다는 도적의 소굴로 찾아들었다.

  그 곳은 매우 험하고 가파른 산이었다.

  허생이 숲 속을 한참 헤매고 있자니 서너 명의 도적이 불쑥 나타났다.

  "꼼짝 마랏!"

  도적은 칼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사람들은 도적을 만나면 무서워 벌벌 떨고 심지어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도 한다.

  그러나 허생은 오히려 반가웠다.

  허생은

  "자네들, 마침 잘 만났네. 나를 얼른 우두머리에게로 데려다 주게." 하고, 반갑다는 듯 말했다.

  도적들은 어리둥절해졌다. 그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지만 이런 괴짜는 처음 이었다.

  도적들은 기가 막혀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내 말을 듣지 못했는가? 얼른 앞장서게!"

  허생이 큰 소리로 재촉했다.

  도적들은 허생의 위엄에 눌려 꼼짝 못하고 그를 우두머리에게 데리고 갔다.

  허생은 도적의 우두머리에게 반갑게 인사하고는 말했다.

  "내가 이 곳을 찾아온 것은 해치려는 게 아니니 걱정 말게. 다만 궁금한 것이 몇 가지 있으니 알려 주길 바라네. 자네들 천 명이 돈 천 냥을 도적질해서 서로 나누어 갖기로 한다면, 한 사람 앞에 얼마씩 돌아가겠는가?"

  그러자 도적의 우두머리는

  "그야 한 사람 앞에 한 냥이지." 하고 얼른 대답했다.

  허생은 기가 막히다는 듯,

  "그래 겨우 한 냥을 얻기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고 그 짓을 한단 말인가? 참으로 답답한 사람들이로군. 왜 그렇게들 속이 없는가?" 하며 혀를 끌끌 찼다. 허생은 계속해서

  "그럼, 자네들에게는 아내가 있는가?" 하고 묻자, 도적들은

  "없소이다." 하고 말했다. 허생은

  "거참, 안됐군." 하며 계속 물었다.

  "그럼, 논밭은 있겠지?"

  그 말에 도적들은 와르르 웃어 댔다.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구먼! 생각 좀 해 보슈. 우리에게 농사지을 땅이 있고 마누라가 있으면 도적이 왜 됐겠수? 이토록 힘들고 고달프게 도적질을 왜 하겠느냔 말이오."

  "그럼, 그렇고말고!"

  도적들이 대답했다. 그러자 허생은

  "그렇다면 왜 아내를 얻고 집을 짓고 소를 사서 농사를 짓지 않나? 그렇게 살아간다면 도적놈이란 더러운 이름도 듣지 않을 게 아닌가. 그뿐 아니라 살림살이하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고, 또 밖으로 여기저기 나다닌다 해도 아무도 잡아가지 않을 테니 그 얼마나 좋은가? 오래도록 잘 입고 배불리 먹으면서 편하게 지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게 뭐가 있겠나!" 하고 말했다.

  도적들은 너무 기가 막혀 말문이 콱 막히고 말았다.

  우두머리 도적은

  "허허, 그걸 누가 몰라서 그러겠소. 그것은 누구나 간절히 바라는 바이지. 다만 돈이 없어서 그렇지 않소." 하고 대꾸했다.

  그러자 허생은 껄껄 웃으며

  "도적질을 한다는 사람들이 어찌 돈이 없는 것을 걱정한단 말인가? 참으로 그것이 자네들의 바람이라면, 내 자네들을 위해서 돈을 마련해 주겠네. 내일 저 바닷가에 나가 보게. 붉은 깃발을 단 배들이 여러 척 보일 걸세. 그것은 모두 돈을 가득 실은 배라네. 물론 돈의 임자는 나일세.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자네들이 가지고 싶은 만큼 마음껏 챙겨 가게."

  이렇게 말하고는 훌쩍 떠났다.

  도적들은 허생의 말이 하도 어이가 없어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그를 단지 미친 사람이라고 여기기에는 어딘가 남다른 데가 있어 보였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면 그렇게나 떳떳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꾀죄죄한 차림새를 보아하니 영 미덥지가 않았다.

  만약 그가 그처럼 가진 돈이 많다면 그런 낡아빠진 옷은 안 입었을 것이 아닌가.

  제 모습이 초라한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을 도와주겠다니, 그것은 도적들의 머리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적들은 허생의 말을 믿지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돈을 담을 자루를 만들기에 바빴다. 

   





   도적들을 데리고 섬으로


  이튿날

  도적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날이 밝자마자 바닷가로 달려나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허생은 삼십만 냥이나 되는 많은 돈을 배에 싣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도적들은 깜짝 놀랐다.

  모두들 입을 딱 벌린 채 다시 다물 줄을 몰랐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제 볼을 꼬집어 보는 도적도 있었다. 모두들 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도적들은 모두 그 자리에 엎드려 허생에게 큰절을 하였다.

  "이제부터 오직 나리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허생은 큰 소리로

  "여기 있는 이 돈을 어디 너희들이 질 수 있는 대로 맘껏 가지고 가 보아라." 하고 말했다.

  그러자 도적들은 앞을 다투어 달려들었다. 저마다 가지고 온 자루에 돈을 가득

가득 담았다.

  그러자 제아무리 기운 센 도적일지라도 백 냥을 짊어지지 못했다.

  "쯧쯧, 돈 백 냥도 짊어지지 못하면서 무슨 도적질을 한다고 그러는가? 답답하고 딱한 이 사람들아, 정신차리게나!"

  허생의 말에 도적의 우두머리가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도적의 우두머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나리, 그 동안 저희들이 못된 짓을 너무도 많이 했습니다. 죄 없는 마을 사람들을 못되게 굴고, 남의 재물을 빼앗았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많은 돈을 저희들에게 거저 주시니, 그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허생은

  "자, 내가 술과 안주를 마련해 놓았으니 모든 것을 잊고 편안한 마음으로 맘껏 들게나." 하고 말했다.

  모두들 취하도록 많이 마셨다.

  도적들은 허생에게서 큰 감동을 받았다. 그들의 눈에 고마움의 눈물이 가득하였다.

  허생이 도적들에게 말했다.

  "이제 와서 자네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평민이 되어 살고자 하여도 너무 늦었네. 자네들의 이름이 도적의 명부에 올라 있으니, 관가에서 가만 있지 않을 걸세. 그렇다고 따로이 갈 곳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잘됐네. 우리 이렇게 한번 행동으로

옮겨 보세. 조금 전에 자네들이 각자 자루에 담은 백 냥씩을 가지고 가서 마음씨 착하고 어여쁜 여인을 아내로 삼아 장가를 들고, 소 한 마리씩을 사 가지고 오게나. 자네들의 솜씨를 한번 구경해 보겠네. 난 여기서 자네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겠네. 그러니, 혹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다른 도적들을 만나거든 이 소식을 알려 주게나. 나는 예서 기다리고 있다가 누구에게나 지고 갈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나누어 주겠네."

  허생의 말을 들은 도적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들은 도적의 무리 속에 들어간 뒤로는 늘 숨어 지내며 떳떳하게 살 수 없었다. 배가 고프면 몰래 마을로 내려가 남의 것을 훔쳐 가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아내를 맞이할 돈과 소를 그냥 주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도적들은

  "예, 잘 알겠습니다."

  하고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저마다 돈 자루를 짊어지고 흩어졌다.

  그들이 떠나자 허생은 섬으로 갈 채비를 서둘렀다.

  우선 그들이 타고 갈 배를 마련했다. 그러고는 이천명의 식구가 일 년동안 먹을 양식을 마련하는가 하면, 살림과 농사짓는 데 필요한 것들을 모두 사들였다.

  세간, 농기구, 씨앗들, 가축의 새끼, 집을 짓는 데 필요한 연장, 옷감, 책 따위를 마련하여 배에 실었다.

  떠날 준비를 단단히 해놓은 허생은 도적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약속한 날짜가 되자 도적들은 모두 모여들었다.

  허생은 그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말하였다.

  "모두들 약속을 지켜 주어 참으로 고맙네. 내 자네들이 살 만한 좋은 곳을 보아 두었다네. 우리 모두 그곳에 가서 한마음 한뜻이 되어 열심히 살아 보세. 착한 마음으로 서로서로를 아껴 주세나.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세나.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다 같이 힘써 보세나!"

  "좋습니다요!"

  도적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자, 떠나자!"

  허생은 배에 짐을 싣고 사람을 다 태우자, 그 섬으로 행했다.

  허생은 이렇게 도적들을 이 땅에서 모조리 몰아간 것이다.

  이 때부터 온 나라 안이 조용해졌다.

   





  살기 좋은 섬을 만들다.


  허생이 거느린 수백 척의 배들은 긴 항해를 시작하였다.

  며칠이 지났다.

  배는 목적지인 빈 섬에 별 탈 없이 무사히 닿았다.

  허생이 먼저 뭍에 올랐다.

  "자, 여기가 바로 우리들이 살아갈 보금자리일세. 모두 배에서 내려 둘러보게."

  사람들은 모두 섬에 올라가 두루 살피고 다녔다.

  숲에서는 아름다운 새소리가 들렸다. 흙이 매우 보드랍고 땅이 아주 기름진 곳이었다.

  동물들은 낯선 사람들을 보아도 달아나지를 않았다.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사람들은 신기한 듯 섬을 두리번거렸다. 새로운 출발을 하는 그들의 마음은 무척 설레면서도 굳게 다져졌다.

  허생은 그 곳에서 할 일을 사람들에게 차근차근 일러 주었다.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대나무를 엮어 울타리를 세웠다. 모두들 힘을 합쳐 열심히 일하였다.

  마을 터를 닦고 우물도 파고 길도 내었다. 그리고 논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 하나 살지 않던 섬에 큰 마을이 생겼다.

  땅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니 워낙 기름진 곳이라 밭갈이와 김매기를 하지 않아도 곡식 이삭이 알차게 여물었다.

  이제 이 곳 사람들은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었다.

  예전에 남의 것을 빼앗던 나쁜 도적들이었지만, 모두들 넉넉한 생활을 하고 보니, 그 누구도 남의 물건을 넘보는 이가 없었다. 모두들 맑고 따뜻한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갔다.

  섬은 점점 살기 좋은 곳이 되었다.

  어느덧 무르익은 곡식을 거두었더니 대풍작이었다. 삼 년 동안 먹을 식량을 쌓아 놓고도 양식이 남아돌아, 나머지는 곰곰 생각한 끝에 장기도에 갖다 팔기로 했다.

  장기도는 일본에 딸려 있는 섬으로, 집들이 삼십만 호나 되었다.

  때마침 그 곳은 여러 해 동안 큰 흉년이 들어서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다.

  허생은 곡식을 실은 수백 척의 배들을 이끌고 장기도를 찾았다.

  그 곳 사람들은 비싼 값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곡식을 다투어 사갔다.

  허생은 곧 백만 냥이란 많은 돈을 챙겨 가지고 그들의 보금자리로 되돌아왔다.

  허생은 모든 것이 뜻하던 대로 되었으므로 마음이 흐뭇했다.

  허생은 이제 자기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정말 뭘 좀 해 본 것 같구나."

  허생은 섬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 한자리에 모아 놓았다. 그러고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내가 처음에 자네들과 더불어 이 섬으로 들어올 때에는 먼저 부자가 되게 한 다음에 글도 가르치고 옷이며 갓 따위를 입고 쓰게 하려고 했네. 그러나 땅이 좁고 내 덕 또한 부족하니, 나는 이제 이 곳을 떠나려 하네. 그 전에 몇 가지 일러 둘 말이 있네. 무릇 사람이란 예의를 알아야 한다네. 자네들은 어린애가 태어나고 자라서 숟가락을 잡을 만하거든 수저는 오른손으로 잡아야 하고, 또 하루라도 일찍 태어난 사람이 수저를 든 다음에 먹어야 한다는 따위의 예의를 가르쳐 올바르게

키워야 하네."

  그러고는 다시

  "이 섬에서 다툴 일이 될 만한 것은 모두 없애 버려야 하네." 하고 단단히 일렀다.

  허생은 자기가 타고 떠날 배 한 척만 남겨 두고 나머지 다른배들은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

  "가지 않으면 또한 오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만일 배를 타고 남의 나라에 드나들게 되면, 나쁜 점만 배우게 될 거야. 그리하면 서로 속이고 다투게 될테니까. 이렇게 하는 것일세."

  그리고 은 오십만 냥도 바닷속에 던져 버렸다.

  "바다가 마르면 이것을 얻는 자가 있을 걸세. 백만 냥이라고 하면 나라 안에서도 쓸 데가 없는 엄청난 돈인데, 하물며 이렇게 작은 섬에서 어디다 쓰겠는가? 그냥 두었다가는 자칫 다툼의 씨앗이 될지도 모르겠네."

  허생은 마지막으로 그들 가운데 글을 아는 사람을 모두 불러 내어 배에 태웠다.

  "나는 이제 뭍으로 돌아가겠네. 이 섬에서 다툴 일이 될 만한 것은 모두 없애 버렸네. 부디 서로서로 힘을 모아 부지런히 일하며 사이좋게 지내야 하네. 지나친 욕심은 갖지 말게. 모두의 행복을 진심으로 비네."

  허생은 뭍을 향해 배를 띄웠다.

  섬사람들은 허생과의 헤어짐을 슬퍼하여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섭섭해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든 만나면 헤어지는 법, 슬픔을 억누르며 서로의 안녕을 빌 수밖에 없었다.

  뭍으로 돌아온 허생은 돈을 싣고 온 나라 안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 주었다. 






    변씨를 찾아가다.


  허생은 좋은 일을 많이 했지만, 아직도 십만 냥이란 큰돈이 남았다.

  허생은

  "인제는 변씨에게 빌린 것을 갚아야겠군." 했다.

  지난날 변씨에게 빌린 돈은 만 냥이었으나, 그 동안 그 돈으로 좋은 일을 많이 했으니 그 열 곱을 갚으려 한 것이다.

  허생은 변씨 집 대문 앞에 이르렀다.

  "어험, 이리 오너라!"

  변씨의 집 하인은 대번에 허생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낙망했다.

  이게 어찌 된 것인가?

  5년 전에 비렁뱅이 꼴로 찾아왔던 사람이 그 때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지 않은가!

  하인은 변씨에게 달려가 아뢰었다.

  "주인 나리, 바로 그 사람이 왔습니다요!"

  "그 사람이라니, 누구 말이냐?"

  "오 년전에 초라한 차림으로 찾아와서 만 냥을 꿔갔던 그 선비 말입니다요."

  하인의 말에 주인 변씨는 귀가 번쩍 띄었다.

  "그래? 어서 안으로 모시어라."

  그러잖아도 변씨는 허생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던 참이었다.

  잠시 뒤, 허생이 변씨 앞에 앉았다.

  변씨는 퍽 반가웠다. 그런데 허생을 보니 예전의 초라한 모습 그대로가 아닌가!

  사실 변씨는 허생을 큰 인물로 여기고 있었으므로 은근히 실망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변씨를 만난 허생은 대뜸

  "나를 알아보시겠소?" 하고 물었다.

  변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기억하고 있소. 내 어찌 잊을 수 있겠소? 다만, 인사가 없어서 이름을 모를 뿐이오. 그러나 저러나 그대의 모습이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소 그려. 혹시 빌려 간 만 냥을 몽땅 날려 버린 것 아니오?"

  그러자 허생은 껄껄 웃으며

  "돈과 물질로 해서 사람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은 그대들에게나 있는 일이오. 만냥이 아무리 귀하다 한들 어찌 도리를 살찌울 수 있단 말이오." 하고는 돈 십만 냥을 변씨에게 척 건네 주었다.

  변씨는 허생의 말을 듣고 기슴이 뜨끔했다. 그리고 낯이 뜨거웠다. 허생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내 한때의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여 글 읽던 것을 끝마치지 못했소. 그대에게 만냥 꾼 것을 부끄러이 여길 따름이오."

  허생은 이렇게 말하고는 곧 돌아가려고 일어섰다.

  변씨는 다급히 일어서서 얼른 허생을 붙잡고는

  "내가 꾸어 준 돈을 받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십만 냥이란 너무 많은 돈이오. 제발 이러지 마시오. 부탁이오. 매우 난처하구려. 예전에 빌려준 만 냥에다 십분의 일의 이자를 쳐서 만천 냥만 받겠소이다. 나머지는 돌려 드릴 테니, 다시거두어 주시오." 하였다.

  그러나 그 돈을 도로 받아 챙길 허생이 아니었다.

  "나도 다 생각이 있어 그렇게 돌려드리는 것이오. 그러니 다른 말씀일랑 아예 하지 마시오. 십만 냥 그냥 받아 두시오."

  "안 되오. 그렇게는 나도 할 수 없소. 이 일이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내 처지가 어떻게 되겠소이까?"

  변씨는 허생을 붙잡고 통사정하듯이 했다. 그러자 허생은 벌컥 화를 내며

  "그대는 어찌 나를 장사치 대하듯 한단 말이오?" 하고는 소매를 홱 뿌리쳤다.

  허생은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변씨는 더 말해야 소용이 없을 줄을 알았다. 그래서 조심조심 허생의 뒤를 밟았다.

  도대체 허생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무척 궁금했다. 

    





  변씨, 허생의 뒤를 밟다.


  허생은 곧장 남산 밑 골짜기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더니 거의 쓰러지게 된 오막살이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변씨는 다시 한 번 크게 놀랐다.

  '저것이 바로 저 선비의 집이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그 많은 돈을 마다한 채 저토록 초라한 집에서 어렵게 사는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게다가 저리도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도 큰 용기를 지니고 있단 말인가?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갔다. 하지만 허생의 뒤를 따라 들어갈 용기는 차마 없었다.

  변씨는 할 수 없이 도로 내려오다가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노파를 보고는 다가가

  "할머니, 저 작은 집은 뉘 댁입니까?" 하고 물었다.

  "허 생원 댁이지요. 허 생원이란 분, 가난하지만 글읽기를 무척 좋아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훌쩍 집을 나갔다지요, 아마. 나간 지 벌써 다섯 해가 되었군요. 마음씨 착한 허 생원의 아내가 홀로 남아 삯바느질을 하여 하루하루 겨우 목숨을 이어 나가고 있지요. 허 생원이 집을 나가고는 아무 소식이 없어 집 나가던 날을 제삿날로 제사를 지내고 있답니다."

  변씨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허생의 집 형편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또 그의 성이 허씨라는 것도 알았다.

  변씨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튿날이었다.

  변씨는 허생에게 받았던 돈 가운데서 만 냥을 빼놓고 그 나머지 구만 냥을 모두 꾸렸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허생의 집을 찾아갔다.

  허생의 집 사립문 앞에 온 변씨는 낮은 목소리로

  "허 생원, 계십니까?" 하고 불렀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변씨는 목소리를 높여 다시 불렀다.

  "허 생원, 계십니까?"

  "누구시오?"

  허생은 그제야 방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나요."

  변씨가 대답하니 허생은 곧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런데 변씨를 보고도 별로 반가워하는 낯빛이 아니었다.

  "변 생원이 여기까지 웬일이시오? 그리고 내 집은 어떻게 알았소?"

  변씨는 허생의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다짜고짜 고개를 숙이며

  "허 생원, 참으로 훌륭하시오! 이토록 어렵게 사시면서 어쩌면 그렇게도 돈을 모으실 수가 있소? 대단하시오. 또 어쩌면 그토록 성인과 군자의 도리를 다할 수 있단 말이오!" 하고 탄복했다.

  그러자 허생은

  "여보시오, 거 무슨 분에 넘치는 말씀이오. 듣기에 민망하구려. 당치 않소. 자, 그 고개 좀 들고 말씀하시오. 어째 사람이 그러하오?" 하였다.

  변씨는

  "허 생원을 만나 보니, 내 자신이 부끄럽고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소. 부디 앞으로 많은 가르침을 주시길 바라오. 그리고 허 생원이 주신 십만 냥에서 만냥을 뺀 나머지 돈을 가지고 왔소. 듣자하니, 부인께서 홀로 남의 바느질 품을 팔아 오 년 동안이나 자녀들을 키우셨다는구려. 지금의 집안 형편이 이렇듯 어려우시니, 제발 집 식구들을 생각해서라도 이 돈을 받아 주시오. 이 돈만 가지면 잘 먹고 잘 입고 편히 지낼 수 있을 것이오."

  변씨는 간절히 청하였다. 그런데도 허생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채

  "당치 않은 말씀이오. 내 일찍이 부자가 되고 싶었다면 백만 냥을 버리고 십만 냥을 가졌겠소? 그러니, 자꾸 이러지 마시고 어서 이 돈을 도로 가지고 돌아가시오!" 하고 딱 잘라 말했다.

  변씨는 기가 막혔다.

  "그래도 경우가 그렇지 않소이다."

  "당신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이렇게 합시다. 내 이제부터는 당신의 덕을 보고 살 것이니, 당신이 자주 찾아 와서 돌보아 주시오. 식구를 헤아려 식량을 보내고 옷감을 대준다면, 나는 그것으로 한평생 만족할 것이오. 무슨 까닭에 재물로써 나의 마음을 어지럽히시오."

  허생은 한사코 이렇게 변씨의 청을 들어 주려 하지 않았다.

  변씨는 여러 가지 말로 허생을 달래 보았다. 그러나 허생은 끝끝내 듣지 않았다.

  변씨는 할 수 없이 돈을 도로 가지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부터 변씨는 허생의 집 쌀 뒤주가 바닥 나지 않도록 식량을 대주었다. 그리고 식구들의 옷감을 철이 바뀔 때마다 갖다 주었다.

  허생도 그것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분량이 많을 때에는 도리어 화를 내며

  "그대는 어찌하여 내게 재앙을 끼치려 한단 말이오? 단지 겨우 입고 먹을 만큼이면 되오. 남는 것을 쌓아 두는 것은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매우 미안한 일이오. 나는 못 받겠소." 하고 거절했다.

  변씨는 날이 가면 갈수록, 또 조금씩 사귀어 갈수록 허생의 말과 행동에 감탄할 뿐이었다.

  허생은 술을 몹시 즐겨하였다.

  변씨가 술을 가지고 찾아가면 다른 때 보다 더욱 기뻐하며 반겨 맞았다.

  두 사람은 서로 술잔을 권커니 잣거니 하면서 취하도록 마셨다.

  그럭저럭 두 해가 지났다. 두 사람의 정은 더없이 두터워졌다.

  어느 날, 변씨는 넌지시 물었다.

  "허 생원, 다섯 해 동안에 어떻게 해서 백만 냥을 벌었소?"

  그 동안 몹시 궁금했던 일이다.

  허생은 차근히 말해 주었다.

  "그거야 쉬운 일이오. 우리 조선은 외국과 왕래를 못하지 않소. 수레 또한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닐 수 없지 않소. 이런 형편이라, 여러 가지 물건이 나라 안에서 만들어지고 또 그것이 나라 안에서 고루 쓰이지 못하는 게요. 대개 천 냥이란 적은 돈이어서 나라 안의 물건을 마음껏 사들이기에는 모자라오. 하지만 이것을 열로 쪼갠다면 백 냥 짜리가 열이 되오. 이것을 가지면 열 가지 물건을 고루 살 수 있는 것이 우리 조선 땅이오."

  "듣고 보니 그렇구려. 계속하시오."

  변씨는 귀 기울여 들었다.

  허생의 이야기는 다시 이어졌다.

  "물건의 무게가 가벼우면 돌려 빼기가 쉬운 게요. 그러니 한 가지 물건이 비록 밑졌다 하더라도 아홉가지 물건의 시세는 좋아질 게 아니오. 따라서 이문이 남는 법이니, 이건 보통 작은 장사치들이 하는 방법이오. 더군다나 대체로 만 냥만 가지면 한 가지 물건을 모조리 다 사들일 수 있지 않겠소. 즉, 수레에 실린 것이라면 수레까지 몽땅 살 수있고, 배에 실린 것이면 배까지 몽땅 살 수 있지 않겠느냔 말씀이오. 더 나아가 한 고을에 가득한 것이라도 온 고을을 모조리 살 수 있으니

마찬가지 아니오. 이것은 마치 그물의 코처럼 한번 훑으면 모조리 거두어들임과도 같은 게요. 이를테면, 뭍에서 만들어지는 여러 가지 물건 중에서 어떤 한가지를 가려 슬그머니 혼자 차지해 버린다든지, 바다에서 나는 여러 가지 물건 가운데에서 그 어느 하나를 모조리 거두어들일 수도 있소. 약의 여러 가지 재료 중에서 어느 한 가지를 슬그머니 사 모으는 경우를 생각해 보시오. 그리하면 모든 장사치들은 그 물건을 구경도 할 수 없게 되지 않겠소? 그 얼마나 속이 타고 안타깝겠소."

  "그렇다면, 그 장사 방법은 옳은 일은 아니구려."

  변씨는 허생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허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이와 같은 방법은 나라를 위하는 것이 아니오. 오히려 백성을 골탕 먹이는 것이지. 훗날에라도 나라 일을 맡아보는 벼슬아치들로서 행여나 나의 이런 방법을 쓰는 자가 없기를 바라오. 만일 그런 사람이 있게 된다면, 나라는 큰 혼란

속에서 소용돌이치다가 마침내는 병들고 말게요. 그러니 그 동안 내가 한 일은 결코 잘한 일이 아니오."

  "허 생원은 만 냥의 돈으로 무엇을 독차지했었소?"

  변씨가 자못 궁금하여 물었다.

  허생은

  "안성 장터로 들어오는 나라 안의 과일을 모두 사 거두었소. 그걸 다 사 버렸으니 과일값이 치솟을 수 밖에요. 과일 때문에 한바탕 난리가 나지 않았겠소. 과일값이 껑충 뛰어오른 뒤에, 내가 쌓아 두었던 과일을 내다 판 거요. 이렇게 해서 만 냥이 이내 십만 냥이 되었다오." 하고 말해 주었다.

  변씨는 무릎을 탁 치며 감탄했다.

  "참으로 대단하오. 도대체 그런 생각이 어디서 나왔단 말이오?"

  "결코 잘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니까요."

  허생은 도리어 민망해하였다.

  변씨는 거듭 물었다.

  "그럼, 백만 냥으로 불린 방법은 어떤 것이었소?"

  허생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그것이 그리 궁금하오?"

  "궁금하고말고, 어서 얘기해 보오."

  변씨는 침을 꼴깍 삼키며 재촉했다.

  허생은 천천히 입을 떼어 말했다.

  "십만 냥에서 백만 냥을 만드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었소. 제주도로 건너가서 말총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모조리 사 거두었소그려. 양반들은 의관을 갖추고 다녀야 하는데 그러려면 갓은 꼭 써야 할 것 아니겠소. 그랬더니 또 난리가 났지 뭐요. 말총이 없어서 갓과 망건을 만들지 못하게 된 것이요. 말총값이 열 곱의 이익을 볼 만큼 뛰어오른 뒤에 쌓아둔 것을 내다 팔았지요. 그래."

  변씨는 허생의 말을 가로챘다.

  "그래서 십만 냥을 백만 냥으로 불렸단 말씀이오?"

  "그렇소. 돈 버는 것은 이렇게 손쉬운 것이라오."

  허생의 이야기를 들은 변씨는 다시 한 번 놀랐다.

  "허 생원은 과연 보통 사람이 아니구려! 만 냥에서 십만 냥을, 다시 십만 냥을 백만 냥을 벌어들이다니, 놀랄 일이오!"

  허생은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나는 벌어들인 돈을 단 한푼도 나를 위해 쓴 일은 없었소. 몇 해 전에 나라 안에 도적이 들끓어 어수선했던 것을 기억하시오? 그 때 나는 도적들을 데리고 어느 빈 섬으로 갔소이다. 그 섬은 조선 땅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이오."

  변씨는 입이 딱 벌어졌다.

  "아니, 어떻게 무지막지한 도적놈들을 이끌고 갔단 말이오?"

  "도적들에게 돈을 주었소. 그래서 그들에게 아내를 얻게 하고, 소 한 마리씩을 사 오라고 일렀지요. 이천 명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모두들 시키는 대로 잘 따라 주었소. 나는 식량에서부터 씨앗이며 농기구, 살림 세간에 이르기까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빠짐없이 마련하였다오. 그렇게 해서 수백 척의 배를 이끌고 긴 항해를 하여 그 빈 섬에 닿았소."

  "그 다음은 어찌하였소?"

  "그들에게 스스로 섬을 일구도록 가르쳤지요. 그래 얼마 안 가서, 사람 하나 살지 않던 그 곳에 마을이 생기고 논밭이 생기고 또 곡식이 무르익었지요. 그래서 그 해는 풍년이었소. 배불리 먹고, 또 곡식을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도 남아서 일본에

갖다 팔았지요. 그렇게 해서 돈 백 만 냥을 벌었다오."

  "그래, 그렇게 많은 돈을 어디다 쓰셨소?"

  변씨가 물었다.

  "그 엄청난 돈을 어디다 쓰겠소? 그 돈을 그 곳에 그냥 두었다가는 서로 다투게 될까봐 백만 냥 중 오십만 냥은 바닷속에 던져 버렸지요. 그리고 수백 척의 배도 다 불살라 버렸소."

  "오십만 냥을 바닷속에 던져 버리다니! 그런데 배는 왜 태워 버린 게요?"

  "그것은 다 까닭이 있지요. 섬사람들이 배를 타고 다른 나라를 드나들게 되면 자연히 나쁜 버릇을 배우게 될 것 같아서요."

  변씨는 허생의 깊은 데에 감탄했다.

  그런데 변씨는 오래 전부터 궁금하게 여기던 것이 하나 있었다.

  "허 생원, 처음에 내가 당신에게 만 냥을 내줄 것을 어떻게 알고 나를 찾아왔었소?"

  허생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이윽고, 입을 열어 말하였다.

  "그대가 반드시 만 냥을 내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아니오. 다만 누구라도 많은 돈을 가진 자였다면, 나에게 주지 않을 수 없었을 거요. 나 스스로 재주를 헤아려 본다면, 넉넉히 백만 냥을 벌 수도 있었겠지만 타고난 운명은 저 하늘에 달려 있는만큼, 내 어찌 그것을 미루어 헤아릴 수 있겠소. 그래서 나를 알아보고 쓰는 자는 복이 있는 사람이오. 그는 반드시 부자가 된 위에 더 큰 부자가 될 터이니, 이는 곧 하늘에서 명을 내린 것이오. 그러니 돈을 아니 줄 까닭이 있겠소. 그리고 내 이미 만 냥을 얻은 뒤엔 그의 복을 빌려서 행한 것뿐이오. 그런 까닭에 움직여 향하면 반드시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소. 만일 내가 사사로운 재물로써 혼자서 일을 시작했었다면 그 성패 또한 알 수 없었겠지요."

  변씨는 허생의 말을 듣고 매우 감탄하였다. 그는 분명 매우 큰 인물이었다. 변씨는 허생의 재주가 아까웠다.

  변씨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윽고 입을 열어 말했다.

  "바야흐로 지금 우리 나라는 남한산성에서 오랑캐에게 당한 병자호란의 부끄러움과 욕됨을 씻으려 하고 있소. 이제야말로 지혜와 재주를 지닌 뜻있는 선비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한번 일어나서 슬기를 펼쳐 보일 때가 아니겠소.

  그대와 같이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도 이렇게 묻혀 살며 이 세상을 마치려 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

  변씨와 허생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다.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다.


  조선은 기나긴 칠 년 동안에 걸친 일본과의 싸움이었던 임진왜란으로 소중한 많은 것을 잃었다. 그래서 나라는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전쟁이란 끝난 뒤에도 상처가 쉽사리 가시지 않는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그 무렵 우리 나라는 중국의 명나라와 가까이 지내고 있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우리 나라를 도와 주었다.

  이런 일로 하여 두 나라는 더욱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우리 나라가 몹시 어려울 때 도와 주었으니, 어찌 명나라에게 고마운 마음이 없겠는가.

  그런데 차츰 쇠퇴하기 시작하던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많은 군사를 보내어 우리 나라를 도운 일로 하여 나라의 힘이 더욱 기울게 되었다.

  이 틈을 타서 만주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던 여진족들이 차츰 세력을 넓혀 나갔다.

  여진족의 추장인 누루하치는 북쪽 오랑캐를 다스려 하나로 통일하고는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워 만주 땅을 지배하였다.

  후금의 세력은 차츰 커졌다.

  누루하치는 명나라 땅을 탐내어 늘 명나라를 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후금은 명나라를 치기 위해서는 명과 사이가 좋은 조선을 먼저 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후금은 조선 인조 5년에 군사를 보내어 우리 나라로 쳐들어왔다. 이것이 이른바 정묘호란이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조선은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으라는 북쪽 오랑캐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후금의 군대를 돌려보냈다. 조선은 그들과의 싸움에서 져서 북쪽 오랑캐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참으로 분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 후, 후금은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에 그들의 군대가 먹을 식량과 전쟁에 쓸 배를 달라고 갖가지로 무리한 요구를 해 왔다.

  더군다나 인조 10년에는 형제의 관계를 고쳐 임금과 신하의 관계로 하자고 요구해 왔다. 더불어 그 예의를 깍듯이 차려야 한다고 했다. 또한 해마다 그들에게 바치던 공물을 늘릴 것을 요구했다.

  참으로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이처럼 북쪽 오랑캐가 여러 가지로 억지 생떼를 부리며 군사를 보내어 괴롭히자,우리 백성들은 분해서 치를 떨었다. 그래서 더욱더 그들을 싫어하고 미워하게 되었다.

  인조 14년 4월에 후금의 태종은 '황제'의 칭호와 아울러 나라 이름을 '청'이라 고쳤다.

  그들의 갖가지 요구를 조선이 잘 따르지 않자 청나라는 많은 군사를 이끌고 또다시 우리 나라에 쳐들어 왔다.

  인조는 어쩔 수 없이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갔다.

  그 곳에서 청나라 군대와 맞섰으나 성 안의 우리 군사들은 식량이 부족한데다가 추위 때문에 거의 힘을 잃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돕기 위해 달려온 군사들도 모두 청나라 군대에게 패하고 말았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인조는 할 수 없이 사십 일만에 욕되게도 삼전도에서 손을 들고 청나라 군대의 요구를 들어 주기로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병자호란이다. 이는 진정 분하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라 안의 뜻있는 사람들은 북쪽 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것이 뼈에 사무쳐 원수를 갚으리라 주먹을 불끈쥐었다.

  그리하여 한결같이

  "북쪽 오랑캐에게 이 원수를 꼭 갚아야 한다."

  "그들에게 무릎을 꿇다니, 이런 욕된 일이 어디 있단 말이냐!"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저들을 혼내 주어야 한다!" 하고 치를 떨었다.

  변씨는 허생에게

  "앞서 얘기한 것처럼 나라 안에서는 남한산성에서 북쪽 오랑캐에게 당한 분풀이를 하자는 사람이 많소. 그 사람들의 사기 또한 하늘에 닿을 듯이 드높소이다. 지금이야말로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이 필요한 때이오. 이러할 때, 그대와 같은 뛰어난

인물이 숨어 지낸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오." 했다.

  그러나 허생은

  "허허, 예로부터 한평생 초야에 묻혀 지낸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소? 졸수재 조성기 선생을 한번 생각해 보시오. 그분은 적국에 사신으로 보내더라도 나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솜씨 있게 해낼 만한 뛰어난 인물이었소. 그런데도 그 분은 한평생 시골 구석에 묻혀 지내며 그냥 늙어 죽지 않았소이까! 또한, 반계거사 유형원 선생이 있지 않소. 그는 넉넉히 군량을 댈 만한 사람이었소. 그러나 산과 들에 묻혀 지내며 외딴 바닷가에서 쓸쓸히 일생을 마치지 않았던가요. 그와 같이 뛰어난 인물들이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그냥 묻혀 있었소. 그러니 오늘날 나라의 일을 맡아하는 벼슬아치의 실력을 가히 알 수 있지 않겠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장사에 솜씨가 있어 내가 번 돈으로 아홉 나라의 임금 머리도 살 수 있었소. 그러나 내가 그 돈을  바닷속에 던지고 온 것은 이 나라에서는 그만한 돈을 쓸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하였다.

  변씨는 허생의 말을 듣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잘 생각해 보시오. 오늘은 그만 돌아가겠소이다."

  변씨는 허생의 집을 나왔다.

  변씨는 오래 전부터 이완과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이완이라는 사람은 성품이 대쪽같이 곧았다. 또한 책읽기를 즐겨하였다. 그는 병법에 밝았으며, 적을 다루는 데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이완은 병자호란의 원수를 갚으려고 큰 뜻을 세우고 힘쓰고 있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 때 이완은 어영대장으로 있었다. 그만큼 어깨가 무거워진 것이다.

  이완은 나라의 힘을 기르고자 뛰어난 인재를 찾고 있었다.

  어느 날 변씨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이완이 말했다.

  "요즈음 백성들 가운데 혹시 뛰어나게 남다른 재주를 가진 사람 못 보았소? 큰일을 함께 해낼 사람이 필요하오."

  변씨는 퍼뜩 허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 인물이 있기는 한데."

  이완은 귀가 솔깃했다.

  "그래요? 어디 한번 말해 보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구려."

  변씨는 허생의 얘기를 하였다.

  "수년 전 일이었지요. 어느 날, 비렁뱅이 같은 차림을 한 어떤 사람이 날 찾아와서는 무엇을 해 보려고 하니 돈 만 냥을 꾸어 달라고 다짜고짜 청하더군요. 물론 그 날 처음 본 사람이었습니다."

  "낯선 사람이 찾아와 그 많은 돈을 꿔 달라고 했단 말이오? 허허 거참, 괴짜로군. 그래 어떻게 하였소?"

  이완은 자못 궁금하였다.

  "처음에는 당황했지요. 그런데 그 사람을 찬찬히 살펴보니, 보통 사람이 아닌 듯하더군요. 차림새는 비록 보잘것없어도 빛나는 눈빛이며 말하는 태도가 어찌나 당당하던지, 어쨌든 매우 뛰어난 사람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 변 생원은 그자에게 만 냥을 내주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는 돈 만 냥을 받아 가지고 안성으로 내려갔다지요. 그 곳에서 나라 안의 과일을 모조리 사들여 어찌어찌하여 십만 냥을 벌었답니다. 이 십만 냥을 가지고 다시 제주도로 건너가서 말총을 몽땅 사들였다가 이번에는 백만 냥을

거두었다는군요."

  "백만 냥이나요?"

  이완은 크게 놀라 입이 벌어졌다.

  "그 사람의 장사 솜씨가 보통이 아니구려! 그 많은 돈을 어찌했답니까?"

  "잘 들어 보십시오. 그 백만 냥으로 나라 안의 도적들을 모아다가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섬으로 데려갔답니다. 그 사람들을 시켜 농사를 지어 그 섬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었대요. 그뿐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왔다는군요. 그는 그 많은 돈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한푼도 쓰지 않고, 오직 남을 위해 썼다고 그래요."

  "참으로 놀랍구려!"

  이완은 변씨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놀라움이 커져 갔다.

  변씨는 말을 이었다.

  "그가 뜻한 바를 이룬 뒤에는, 세상의 속된 욕심을 버리고 본디의 모습으로 돌아왔어요. 많은 돈을 외면한 채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에서 어려운 살림을 하고 있더군요. 아무튼 그는 재주가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래, 그 사람이 이 장안에 살고 있단 말이요?"

  이완은 변씨가 들려 준 이야기가 믿기지 않았다.

  "그렇고말고요."

  "변 생원의 얘기를 듣고 보니, 그 사람은 정말 재주가 신통하고 뛰어난 것 같소.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다니, 곧이들리지 않는구먼. 그 사람의 이름은 무엇이라 하던가?"

  이완이 묻자 변씨는

  "제가 그 사람과 사귀어 삼 년 동안이나 가까이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의 이름은 모릅니다. 다만, 성이 허씨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이완은

  "어쨌든 그 사람은 아주 별다른 인물임에 틀림없군. 허씨라는 그자를 한 번 만나 보고 싶소. 지금 당장 그를 찾아가 보십시다." 하고 서둘렀다.

  바깥은 이미 날이 저물어 어두컴컴하였다.

  이완은 하인들을 거느리지 않고 변씨와 함께 걸어서 허생의 집을 찾아갔다.

  잠시 후 이완과 변씨는 허생의 집 앞에 다다랐다.

  변씨는 이완을 사립문 밖에 세워 두고는 혼자서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허 생원, 자네를 꼭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 함께 왔다네. 지금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네만."

  "그래? 그가 누구인가?"

  허생이 물었다.

  "어영대장을 지내는 이완이라는 분일세."

  "그래? 어영대장께서 왜 날 보자고 한단 말인가?"

  변씨는 이완과 함께 찾아오게 된 사연을 자세히 말해 주었다. 그런데 허생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변씨에게

  "그대가 가지고 온 술이나 어서 내놓으시게."

  하고 딴전을 부렸다.

  그리하여 허생과 변씨는 술잔을 나누었다.

  변씨는 술을 마시면서도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이완이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완이 걱정되어 안절부절못하였다.

  "허 생원, 자네 어영대장을 만나 보지 않을 텐가? 밖에서 기다리고 서 있는 사람 생각도 해야지. 이제 그만 그분을 안으로 불러 모시지 않으려나?"

  변씨는 허생에게 넌지시 권했다.

  그래도 허생은 못 들은 척했다.

  "어허, 이 사람 허 생원, 내 말을 좀 듣게나."

  변씨가 거듭 이야기하였지만 허생은 여전히 딴전을 피우는 것이었다.

  어느덧 밤이 깊었다.

  허생은 그제야 변씨에게 일렀다.

  "손님을 드시라고 할까?" 






    허생, 어영대장을 나무라다.


  변씨는 얼른 나가서 이완을 맞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괜찮소이다."

  이완은 언짢은 빛이 없이 말했다.

  이완이 과연 큰 인물이라고 변씨는 생각하였다.

  이완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허생은 태연히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이완을 맞이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완은 순간 당황했으나 잠시 뒤 마음을 가다듬고 허생에게 인사를 했다.

  "만나게 되어 반갑소. 나는 어영대장을 지내고 있는 이완이라 하오. 그대에 대한 얘기를 듣고, 꼭 한 번 만나 보고 싶은 마음에 찾아온 거요."

  "허생이라 불러 주구려."

  허생이 짧은 말로 대꾸했다.

  이완은 나라에서 재주 있는 사람을 구하고 있다며 찾아온 뜻을 말했다.

  그러자 허생은 손을 내저으며

  "밤은 짧고 말은 기니 듣기에 지루하군. 자네의 벼슬자리가 어영대장이라 했던가?" 하고 말을 놓아 물었다.

  이에 이완은

  "그렇습니다." 하고 공손히 대답했다.

  허생은 다시

  "그래, 그렇다면 나라에서 꽤 믿을 만한 신하로군. 자네에게 숨은 인재를 알려 주겠네. 그러니, 자네는 임금께 아뢰어서 그의 집을 세 번 찾아가도록 권해 보시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물었다.

  이완은 잠시 머리를 떨구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말하기를

  "그건 어려운 일인 듯합니다. 그 다음의 일을 듣고자 하오니 말씀해 주십시오." 하였다.

  그러자 허생은 화를 내어 큰 소리로 말했다.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의 대답이 어찌 그러하오! 나는 이 날 이 때까지 '그 다음'이라는 것을 배우지 못했소. 그러니 난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겠소이다."

  허생은 몹시 언짢아했다.

  이완은 어색한 속에서도 그냥 앉아 있으면서 거듭 물었다.

  "그러지 마시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 다음의 일은 무엇입니까?"

  허생은 할 수 없다는 듯이 말을 시작했다.

  "좋소, 그럼 이번 일은 할 수 있겠지? 명나라는 일찍이 임진왜란 때 우리 나라를 도와 주었소. 우리 나라가 그들에게 입은 은혜가 크오. 그런데 명나라 장졸들의 자손이 도망하여 우리 나라에 많이 와서 살고 있소. 그들은 떠돌이 신세에 외로운

홀아비로 가난하게 살고 있소. 그러니 그대가 조정에 이 사실을 말씀드려 왕실의 딸들을 내어 그들과 혼인시키도록 하시오. 또한 김류와 장유 등의 집 재산을 거두어서 그들의 살림살이를 마련해 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한다면, 왕의 친척이나 권세 있는 집안의 세력이 꺾이게 될 걸세."

  이완은 매우 난처하였다. 이것 또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이완의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그러자 허생은 또 호통을 쳤다.

  "이 일도 어렵다, 저 일도 어렵다 하니, 그러고서 앞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 가장 쉬운 일 한 가지를 일러 주겠네. 그것은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일 테지?"

  이완은

  "예, 무슨 일인지 듣고자 하옵니다." 했다.

  "대체로 크게 의로운 일을 하고자 한다면, 먼저 천하의 뛰어난 인재들과 사귀어 친하게 지내야 할 것일세. 또 남의 나라를 치고자 한다면 먼저 첩자를 쓰지 않고서 이긴 적이 없었네. 지금 만주 땅에는 여진족들이 들어앉아서 천하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네. 아직 그들은 중국의 본토와 친하지 못하고 있는 터이지. 그럴 즈음 조선이 앞장 서서 다른 나라보다 먼저 항복을 했으니, 우리 나라를 가장 믿고 있는 터일세. 그러하니, 이제 곧 우리의 자식들을 보내어 그 나라를 배우게 하고 그 나라의 벼슬 자리도 얻게 해야 하네. 옛날 당, 원나라 때 빈공과(중국 당나라 때 외국인들에게 보이던 과거)를 설치하여 우리 나라 유학생을 받았던 고사를 따르고, 나아가 장사치들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게 해 달라고 하게나. 그러하면, 그들은 반드시 우리의 청을 기뻐 반기며 받아들일 걸세. 그렇게 되면, 나라 안에서도 자제들을 가려 뽑아서 머리도 깎게 하고, 오랑캐 옷을 입혀서 들여보내게나. 지식층은 빈공과에 응시하도록 하고. 또 재치 있는 백성들을 장사치로 뽑아 멀리 중국 본토인 강남에까지 보내어 그들의 형편을 살피게 하게나. 그 고장의 호걸들과 사귀어 친하게 지내도록 하는 걸세. 그리하여 오랑캐를 칠 방법을 잘 생각하여 두라는 말일세. 그렇게만 된다면, 군사를 일으키고 천하의 일을 꾀하여 병자년에 우리가 오랑캐에게 당한 부끄러움을 씻을 수가 있지 않겠나. 그런 다음 명나라의 황족인 주씨를 찾아 천자로 받들게. 만약 주씨가 없으면 천하의 제후들을 거느려 천자가 될 만한 인재를 하늘에 추천하게나. 그러면 우리나라는 잘되어 대국의 스승 노릇을 하게 될 것일세. 그렇게는 못 되더라도 백구의 나라는 될 것일세."

  백구는 임금이 성이 다른 제후를 높이어 부르는 말이다. 이완은 이 말에도 또한 한참 망설였다. 그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완은 겨우 입을 열어 말하기를

  "요즘 사대부들은 모두 몸을 삼가고 예법을 지키고자 합니다. 이러한데 누가 그들의 자제들에게 용감하게 머리를 깎게 하고, 오랑캐의 옷을 입히겠습니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했다.

  허생은 버럭 화를 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사대부란 뭐하는 놈들이얏! 지금 오랑캐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이 나라에 태어나서 제 스스로 사대부랍시고 나라 걱정은 아니하고 쓸데없이 으스대기만 하니 참으로 뻔뻔하지 않나?"

  이완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고개가 수그러들 뿐이었다.

  허생은 더욱 화가 복받쳤다.

  "바지저고리를 온통 희게만 차려 입으니, 이건 장례를 치르는 사람의 옷차림이요, 머리를 한데 묶어서 송곳처럼 상투를 트니, 이건 곧 남쪽 오랑캐의 방망이 상투가 아니냐.

  옛날 중국 진나라의 번어기라는 장수는 후에 연나라에 건너가 있던 중, 원한을 갚기 위하여 자기머리 잘리기를 아까워하지 않았다네. 즉 그는 진시황을 죽이러 가는 자에게 자기 목을 내줌으로써 황제가 의심을 품지 않게 해 끝내 원수를 갚게

한 것이지. 또 중국 조나라의 무령왕은 나라의 힘을 키우고 잘살게 하기 위해 오랑캐의 옷 입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었네. 그런데 지금 이 땅의 사대부란 사람들은 어떠한가? 원수를 갚겠다고 큰소리를 치면서 그래 그까짓 옷 모양을 생각하고 상투 하나를 아낀단 말인가? 앞으로 말을 달리고 칼을 휘두르고 창으로 적을 찌르고 활을 쏘고 돌팔매 던지기 따위의 일을

익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넓은 소매를 고집하고 그것을 지금 세상에 맞게 고치려 들지 않는단 말인가. 예법만 찾아 무엇하려는가? 나라가 있은 다음에 예법도 있는 법이지, 나라가 망하고 난 뒤에 예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완은 허생 앞에서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허생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내 그대에게 나라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세 가지나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도 그 가운데 단 한 가지도 할 수 없다니, 쓸데없이 나라의 녹만 축내고 있는 너 같은 놈을 그냥 살려 둘 수 없다!"

  허생은 벌떡 일어서서 두리번두리번 칼을 찾아 들더니 번쩍 쳐들어 그대로 내리치려 하였다.

  이완은 새파랗게 질려서 허겁지겁 문을 박차고 뛰어 나갔다.

  "네 이놈! 어영대장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도 않으냐, 어딜 도망치느냐!"

  허생의 벼락같이 호통 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이완은 몸을 피해 급히 달아났다.

  겨우 자기 집 앞에 다다르자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휴우,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다. 허생이라는 사람은 듣던 대로 과연 대단한 인물이다. 그렇지만 어찌 나에게 칼을 들이댈 수 있단 말인가!"

  이완은 밤새도록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곰곰 생각해 보니, 언짢아할 일만은 아닌 듯 했다.

  '허생의 말이 백번 옳다! 그는 이 나라의 앞날을 크게 걱정하는 사람이다. 그자야말로 이 나라를 어려움에서 구해낼 수 있는 인물이야!'

  이완은 다시 한 번 허생을 찾아가리라 마음먹었다.

  날이 밝자, 이완은 서둘러 변씨를 찾아갔다.

  변씨는 이완을 미안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맞이했다.

  "어제 일은 참으로 죄송스럽습니다. 허생은 본디 어진 사람이온데, 성질이 워낙 대쪽 같아 벌어진 일이옵니다. 그러니 너그러이 아량을 베푸셔서 화를 푸십시오."

  이완은 화난 빛 없이 밝은 얼굴로 대꾸했다.

  "아닐세. 허생이야말로 내가 찾던 사람일세. 그래, 그자에게 나라 일을 함께 하자고 청하려 하네."

  변씨는 이완의 너그러운 마음에 감탄했다.

  "과연 어영대장 어른 또한 큰 인물입니다!"

  "그런 소리 말게나. 어제의 일을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네. 지금 당장 허생을 찾아가세."

  이완은 변씨와 함께 길을 나섰다. 허생의 집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이윽고 허생의 집 앞에 이르렀다.

  "허 생원, 안에 있는가?"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방 앞의 디딤돌 위엔 짚신 한 짝없이 깨끗했다.

  이완과 변씨는 서둘러 방 문을 왈칵 열어젖뜨렸다.

  텅 빈 방이었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방마다 열어 보았다. 역시 텅 비었다.

  허생은 벌써 집을 비우고 어디론가 떠나 버린 뒤였다.

  변씨와 이완은 마주 보고 서서 말이 없었다.

  "한발 늦었군!"

  쓸쓸한 바람만이 뜰 앞을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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