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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167

[시] 조지훈 - 봉황수(鳳凰愁) 봉황수(鳳凰愁)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아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登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 1940년 '문장' 2월호 13호에 발표된 이 작품은 전연으로 짜여진 산문체의 서정시다. 이 시는 식민지 말기 고궁의 옥좌 밑을 거닐면서 왕조의 몰락을 회고하며 기 심회를 읊은 역.. 2017. 2. 20.
[시] 조지훈 - 승무(僧舞) 승무(僧舞)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1939년 12월 '문장'에 발표된 이 작품은 9연으로.. 2017. 2. 20.
[시] 조지훈 - 고풍 의상(古風衣裳) 고풍 의상(古風衣裳)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附椽) 끝 풍경(風磬)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珠簾)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주빛 회장을 받친 회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내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曲線)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치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雲鞋) 당혜(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胡蝶) 호접인 양 사푸시 춤을 추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 2017. 2. 20.
[시] 윤동주 - 십자가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敎會堂) 꼭대기 십자가(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鐘)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幸福)한 예수·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十字架)가 허락(許諾)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1941년 5월 13일에 지은 시로 부기된 이 시는 자기 희생의 이념을 표현한 작가의 대표적 작품으로, 작가의 순결정신과 속죄양의 시세계를 볼 수 있다. 이 시의 주제는 순절정신이다. 윤동주 (尹東柱 1917~1945) 아명(兒名)은 해환(海換). 북간도 동명촌 출생. 연희 전문학교 문과 졸업. 일본 리쿄오 대학 및 도오지사 대학.. 2017. 2. 17.
[시] 윤동주 - 자화상(自畵像) 자화상(自畵像)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1939년에 창작된 시로 기록되어 있는 이 시의 경향은 지성적이고 상징적이며, 6연으로 짜여진 자유시다. 영상적 수법으로 자신을 조명하고 산문적 표현으로 시적 분위기를.. 2017. 2. 17.
[시] 윤동주 - 또 다른 고향 또 다른 고향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 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으로 가자. ※ 1941년 9월에 지은 시로 부기되어 잇는 이 시는 유학지인 서울(연전)에서 고향인 북간도 용정으로 돌아왔을 때 지은 시로 추정되며, 시의 경향은 지성적, 상징적이며 5연으로 되어 있다. 이 시에서 '또 다른 고향'은 조국일 것이고 '백골'은 죽음처럼 싸늘한 .. 2017.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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